경운궁 내 건물 | |||||
작성자 | 강** | 작성일 | 2014-04-04 | 조회수 | 17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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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문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이 문은 대안문(大安門)이었으나 1906년 대한문(大漢門)이라 개명하였다. 현재의 위치는 도시계획에 의해 서쪽으로 물러난 자리이며, 궁궐의 정문이 동향하고 있는 것은 창경궁의 경우와 같으나, 원래는 중화문 앞쪽에 정문이 있었다고 한다. 궁문의 건축양식은 단층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우진각지붕이다. 궁의 정문으로 단층인 것은 이 문이 유일하다. 오늘날에는 기단과 계단이 묻혀 버렸으나 전에는 다른 궁의 정문과 같이 기단과 석계가 있었다. 대한문이란 현판은 조정 중신 남정철의 글씨이다.
2) 금천교
모든 궁에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溝)가 있고, 거기에는 석교가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덕수궁인 경우 지세 자체가 왕궁이 들어앉을 만한 곳이 아니어서인지 인공적으로 명당수의 금천교를 만들었다. 현재는 어구가 연못처럼 변형되어 있다. 이 금천교는 두 개의 홍예로 구성되어 있다.
3) 중화문
중화문은 궁궐의 중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집인데, 건축 양식은 중화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원래의 중화전은 중층정전이었으며, 그때의 중화문은 현재의 문보다 규모가 더 웅대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1904년 전전각이 소실될 때 이 문도 소실되었고, 중화전이 중건될 당시 재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화전과 같이 평면 규모에 비해 기둥 높이가 훤칠하여 다른 궁궐 전문(殿門)에서 볼 수 없는 비례감을 보여주는 문이라 할 수 있다.
4) 중화전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형식을 취하고 있는 중화전은 중화문과 함께 1902년 건립되었으나 1904년 화재로 전전각(全殿閣)과 함께 소실되었던 것을 1906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조선조 최후의 궁궐 정전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형식을 취하고 있는 중화전은 중화문과 함께 1902년 건립되었으나 1904년 화재로 전전각(全殿閣)과 함께 소실되었던 것을 1906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조선조 최후의 궁궐 정전이다
5) 광명문
광명문은 원래 함녕전의 정문으로 함녕전 남쪽에 있었는데, 흥천사 종과 자격루 등을 전시 할 목적으로 일제 때 지금의 위치로 이건되어 문의 기능을 잃고 말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문형식으로, 중앙 도리간에 판비가 있었으나 이건되면서 없어졌다. 가구는 원주 위에 주심포를 올리고 창방위에는 장화반(長花盤)을 얹어 주심도리를 받고 있으며, 맞보형식의 대량을 중심고주에서 받게하여 중도리를 얹고 있다. 문의 가구 기법은 견실하며 전문(殿門)으로서는 규모도 크고 내용도 충실하다.
6) 포덕문
포덕문은 원래 덕수궁의 동쪽에 위치했던 문이다. "포덕문" 현판은 현재 덕수궁의 후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평성문에 걸려있다.
7) 궁중 유물 전시관 (석조전 동관)
이 건물은 1900년 착공하여 1910년 완공된 지상 3층 연건평 1,247평의 석조 건물이다. 외관은 19세기 초 서구에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적 양식으로 영국인 기사 하딩에 의에 설계되었고 공사초기에는 한국인 심의석, 러시아인 사바틴, 일본인 오가와 등이 감독하였으며, 후반에는 영국인 데이비슨이 감독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1층은 시종들의 대기장소, 2층은 접견장소로 이용됐으며 황제부부는 3층에 거쳐하셨다. 현재는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궁중유물전시관은 5대 궁 12개 능 · 원에 분산 · 소장되어 오던 중요 궁중유물을 한데 모아, 보다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관리와 왕실문화 생활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1992년 12월 개관되었다. 전시실은 크게 역사실과 유물전시실로 나뉘어지고 1실부터 10실까지 유물의 재질별, 주제별로 분류 전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유물들은 왕실에서 사용하던 당 시대 최고의 장인들이 만들어낸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우리관에서는 매년 주제를 달리하는 특별전을 마련하고 있으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교육으로 조선시대 왕실문화 관련분야의 전문강좌를 실시하여 시민과 함께 하는 문화 박물관의 역활을 하고 있다.
8) 덕수궁 전시관(석조전 서관)
1937년 이왕직 박물관으로 지은 별관은 연면적이 1,104평이며, 해방 뒤 석조전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덕수궁 현대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덕수궁미술관은 근대미술 전문기관으로서 근대미술의 조사 · 연구, 작품의 수집과 보존, 기획 및 상설전시, 각종 교육프로그램의 개발과 실시, 학술과 출판, 근대미술 작품과 정보의 국제적 교류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도심 외곽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본관의 관람 불편 요소를 해소하여 강북권에 새로운 문화공간을 활성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9) 준명당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집으로 중화전 북쪽, 즉조당 서쪽에 위치한다. 고종황제가 이곳에 거처하기도 하였고, 한때 고종의 초상화와 순종의 초상화가 봉안되기도 하였다. 또한 고종은 이곳에서 외국 사절들을 영접하기도 했다. 내전으로 동쪽에 자리잡은 즉조당과 같은 기능의 건물로 양식도 유사하다. 즉조당의 퇴간(退間)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데 비해 준명당의 근간은 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10) 즉조당
즉조당은 중화전의 북쪽에 위치한 건물로, 순종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1904년 화재를 입어 소실된 것을 같은해에 중건한 것이다. 궁의 침전으로서는 규모가 크지 않으나,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간결하고 짜임새가 돋보인다. 전면 동쪽으로 편향하여 3칸의 퇴(退)를 두어 개방하였고, 내부는 거실로 이용하였다. 건물에 비해 높은 기단을 두었고, 서쪽의 준명당과 연결되도록 2칸 복도를 두고 있다.
11) 덕홍전
덕홍전은 고종황제가 내외빈객들을 접견하던 건물이다. 1911년에 건립되어 현존 전각(殿閣)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殿閣)의 하나이다. 기단은 장대석을 돌려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翼工)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다. 팔작지붕의 마루에는 양성(兩城)하고 귀마루에는 용두와 잡상(雜像)을 얹어 잡귀와 화재에 대비하고 있다. 현재는 건물 내부를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복원하여 당시의 궁중 생활상을 볼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12) 정관헌
궁궐 안의 양관(洋館)으로는 최초의 것이다. 1900년경에 건립되었으며 고종황제의 연유처(宴遊處)로 사용되었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장방형의 평면으로 내부 공간은 외진(外陣)과 내진(內陣)으로 구분 되었는데, 내진고주는 굵은 원주로 되어 있고, 외진주는 목제기둥을 사용하여 주두를 로마네스크 형식으로 하였고, 주간(柱間)상부는 투각(透刻)으로 장식하였다. 외연주 하부는 철제 난간을 돌렸는데 무늬는 투각으로 서록(瑞鹿), 송(松), 박쥐,당초(唐草) 등을 넣어 한국적인 느낌을 풍겨주고 있다.
13) 함녕전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사용되던 건물로 1904년 화재로 인해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함녕전은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 건물이기도 하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9칸, 측면 4칸인데 서쪽 뒤편에 4칸이 더불어 ㄱ자형으로 되었다. 앞에서 보면 중앙 3칸은 근간으로 하여 개방하였고, 나머지 부분은 전부 거실로 이용하도록 되어 있다. 기둥 위에 올린 공포는 익공식이며, 건물이 거대한 데 비해 장식은 간결하다.
14) 석어당
덕수궁 내의 유일한 이층 건물로, 1904년의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같은 해에 다시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건했다. 원래의 석어당은 임란 때 선조가 피난으로부터 환도하여 승하할 때까지 16년간 거처하였던 곳이며,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이 건물 앞뜰에 꿇어앉혀 죄를 책한 곳이기도 하다. 아래층이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단간인 굴도리집으로, 올라 다니는 계단은 서쪽 끝에 설치되었다. 중층이면서도 가식이 없는 민간풍의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친근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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