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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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적성산성
작성자 임** 작성일 2017-07-13 조회수 267

개요

소백산을 가로질러 단양과 영주를 잇는 죽령 고갯길이 남한강에 접하는, 해발 319.8m의 구릉 정상부에 축조된 석축산성이다. 북쪽으로 온달산성, 남한강의 물줄기와 소백산을 통과하는 고대 통로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에 유리한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어 삼국의 주요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신라가 죽령을 넘어 한강의 상류지역에 진출하고, 북쪽으로 세력을 팽창시킬 수 있는 요충지로 이용하던 곳이며, 신라 북진의 전초기지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생각된다. 대략 6세기에 적산현(적성)이 신라에 편입되면서,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에 의해 집중 경영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성 안에서 출토된 유물들 중 신라 토기와 기와 조각이 주로 확인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 토기 조각과 고려시대의 토기·청자 조각도 출토되어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318(충숙왕 5)에 단양군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고려 말기에 단양 근처의 적성산성 대신 멀고 험준한 다른 성으로 대피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통해 적성산성이 이미 고려 말기에 피난처 기능을 상실한 폐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축성방법이 매우 견고하게 되어있어, 신라의 축성 기술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구조

둘레 923m 지정면적 88,648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와 있는 바로는 성산성(城山城)은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1,767척이다.”라고 나와 있다. 벽은 인공을 거의 가하지 않은 자연할석으로 안팎을 포개며 엇물려 쌓은 내외 협축 방식으로 되어있다. 북쪽 벽에서 남쪽 벽으로 낮아지며 돌아 나가는 동쪽 끝부분은 완만한 경사지로, 가장 쉽게 성벽에 접근할 수 있는 취약한 부분인데, 문터가 있었다가 메워진 흔적이 남아 있다. 문터 안쪽에는 투석용으로 추정되는 석환(石丸) 무더기가 있다. 북동쪽의 성벽이 잘 남아 있는 곳은 높이가 3m쯤 되며, 남서쪽·남쪽·동남쪽의 세 곳에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성벽의 절단부가 있다. 현재 성벽 일부와 문지, 단양 적성비(丹陽 赤城碑) 등이 남아있다. 남쪽으로 죽령, 북동쪽으로 남한강의 상류지방, 북서쪽으로 남한강을 따라서 하류 쪽으로는 청풍·충주 쪽으로 이어지는 교통상의 요충에 자리잡고 있어서, 삼국시대 초기부터 백제·고구려·신라에 매우 중요한 곳으로 여겨진다. 능선을 따라 길게 돌출된 곡성형태의 체성구조, 현문식 성문과 성벽의 보축시설, 내한도 등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체적인 구조, 입지조건, 출토유물 등이 북쪽의 온달산성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