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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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내 건물
작성자 강** 작성일 2014-04-04 조회수 1403
1) 돈화문 (보물 제383호) 창덕궁의 정문으로 원래는 화강석조의 하얀색 댓돌이 있었고 그 위에 이층으로 세운 중문이었다. 이런 양식은 옛날 삼국시대로부터 궁궐의 정문으로 채택되어 왔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대문은 광화문으로, 홍예문이 셋이 열린 육축(陸築)위에 올려 세운 구조이다. 돈화문과는 그 모습이 완연히 다르다. 창덕궁의 모든 구성은 이궁(離宮)으로서의 조촐한 맛을 지니고 있다. 돈화문은 그런 구조를 대표한다. 창덕궁과 더불어 돈화문도 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 복구된 것은 선조 40년(1607)이었다. 조선 궁궐에 현존하는 중문으로서는 제일 오래된 건물이다. 2) 금천교 조선왕궁에는 북(玄武)에서 발원하여 외당을 회유하면 극히 길하다는 명당수가 있고 궁의 정문에서 궁전으로 들어가려면 이 명당수 위에 놓여진 돌다리를 통과하여야 한다. 경복궁의 영제교며 창경궁의 옥천교와 덕수궁과 경희궁에도 있었던 그런 다리가 창덕궁에서는 금천교이다. 금천교는 길이가 12.9미터, 폭이 12.5미터로, 태종 11년(1411)에 조성되었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석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다리의 구조를 보면 하천 바닥에 깔린 기반석 위로 홍예 2틀을 만들고 멍엣돌위에 돌난간을 세우고 다리 윗부분은 장대석으로 깔았다. 중앙부의 홍예 기반석 남쪽 면에는 해태상을, 북쪽에는 거북상을 설치하였다. 이들 상 뒤로 홍예틀이 만나는 기석에 귀면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다. 다리 위 양쪽에는 돌로 난간을 돌렸는데, 주석이 서고 그 사이에 동자석이 설치되고 한판 돌로 만든 풍혈이 끼어 있다. 이 다리는 평면이 아니라 중앙이 들린 구릉형이다. 이 다리 앞에 명당수와 관련되는 궁의 외당문인 진선문이 있다. 돈화문내원에 회화나무의 수림이 울창한데, 이는 고대부터 궁문내정에 정승나무를 심는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궁의 별칭을 괴신(槐宸)이라고도 한다. 3)진선문 창덕궁에는 궁 정문에서부터 정전에 이르는 주출입선에 세 개의 문이 세워져 있다. 세 개의 문은 돈화문, 진선문, 인정문인데, 돈화문은 제일 바깥에 위치한 창덕궁의 정문이고, 다음 금천교를 건너 만나게 되는 진선문은 외행각 주출입문이며, 마지막 인정문은 내행각 주출입문이다. 이처럼 진선문은 창덕궁 주출입선상에 위치한 중문이므로 문의 전후로는 어도를 두었다. 진선문은 남북축의 돈화문이나 인정문과는 달리 동서축으로 세워져 있어, 돈화문으로 들어와 북측으로 진행하다 동측으로 꺽어서 금천교와 진선문을 지나게 되며 다시 북측으로 꺽어서 인정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외행각의 동측 진선문에 대응하는 위치에는 숙장문이 세워져 있어 진선문과 함께 동서축을 이루고 있다. 진선문 북측 행각끝에는 동으로 정청(政廳)을 연결시키고 남측 행각끝에서는 동으로 내병조(內兵曺)가 연결된다. 4) 숙장문 숙장문은 돈화문으로부터 인정전 외행각을 거쳐 선정전 및 내전지역(內殿地域)에 이르는 주출입선상에 위치하는 문으로써, 외행각의 동측면이자, 어차고의 서측편에 위치한다. 북측으로는 인정문 좌월랑과 담장으로 연결시켰고, 남측으로는 인정전 외행각의 동행각과 연결하였다. 그러나 숙장문과 함께 인정전 외행각은 인정전 내행각과는 다소 틀어진 배치로 되어 있으며, 진선문과 함께 동서방향의 축(軸)을 형성하고 있다. 문의 전면에 해당하는 인정전 외행각의 내부 쪽에는 어도를 두었는데, 진선문 및 인정문과 연결된다. 어도는 중앙부와 양측부로 나누어 세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부를 양측부 보다 높여 두 단으로 구성하였다. 5) 인정문 (보물 제813호) 임금이 만조백관과 조회를 하려면 인정전에 모인다. 인정문을 들어서야 참예할 수 있다. 인정문은 인정전을 에워싼 행각의 대문으로 남쪽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나지막한 댓돌에 설치한 돌층층다리를 올라서면 좌, 우, 중앙 3간 문을 들어서게 된다. 다른 곳의 대문과는 그 구조와 장식이 다르다. 원래의 모습에서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행각(行閣)은 전시장으로 쓰던 것을 개조하여 복원하였다. 태종 5년에 창건한 것이나 임진왜란을 겪고 복구되었다가 인조반정 때 손상을 입었다. 영조 20년(1744)에 불에 탔는데, 이듬해 곧 중건되었다. 순조 3년 인정전이 불에 타 이듬해 재건되는데, 이때 인정문의 보수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6) 인정전(국보 제 225호) 임금이 높이 앉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어좌를 중앙에 두고 여러 가지 장엄을 베풀면서 권위 있게 지은 법전이 각 궁궐마다 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으로 궁궐의 배설로는 외전의 중심이 된다. 외전은 보통 내전의 남쪽에 있어 중요한 전각들을 자오선을 주축으로 하는 선상에서 좌향시키기 마련인데, 창덕궁은 경복궁에서와 같은 규범에서 벗어났다. 이궁이란 점을 강조하면서 지형에 따라 적절히 배설하는 방도를 강구한 것이다. 건물형태는 이중의 월대 위에 중층으로 세워진 집인데, 들어가 보면 아래 위층이 트여 있다. 20칸 크기의 다포계 공포양식을 지닌 전각으로, 조선조 말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전각안 천정 중앙에는 봉황 한쌍이 장식되어 있고, 북측 중앙에 닫집으로 장엄된 용상(어좌)이 설치되어 있다. 7) 선정전 보통 때 임금이 신료들과 만나 정사를 의논하는 곳을 편전이라 부르는데, 이 전각이 창덕궁의 편전이다. 건물 중앙에 임금이 일월오악병(日月五嶽屛)을 배경으로 앉고, 그 앞에 대소신료들이 위계에 따라 동서로 벌려 앉았다. 동쪽엔 문관이, 서쪽엔 무관들이 자리잡는다. 그리고 한쪽에 사관이 앉아 문답하는 내용을 속기하여 사초(史草)로 삼는다. 편전은 외전 중 하나이며 임금의 연침(燕寢) 가까운 자리에 건립된다. 선정전은 아홉칸밖에 안 되는 단층의 낮고 아담한 건물로, 외벌의 댓돌을 넓게 설치한 것과 지붕에 푸른색 유약을 입힌 청기와를 이은 점이 특색이다. 8) 희정당 (보물 제 815호) 대조전 남쪽에 있으며, 임금의 거처로, 평시 임금이 정사를 보던 곳이다. 중앙의 정면 3칸, 측면 3칸을 통간(通間)으로 하여 응접실로 사용하였고, 응접실의 서편은 같은 크기로 하여 회의실로 사용하였다. 응접실의 동쪽벽 상부에는 <총석정절경도>, 서쪽에는 <금강산만물초승경도>가 걸려 있다. 고종은 경복궁이 완성되기까지는 여기에 머물렀고, 순종이 승하할 때 끝까지 여기에 있었다. 대한제국은 옛부터의 관습과 개화에 따른 신식문물을 절충시키는 시국에 처했을 때라, 임금의 처소도 전각은 옛법에 따르고 내부는 서양식으로 장치하는 방식을 반영하였다. 지금의 전각은 1917년 화재를 입어 소실되었던 것을 1920년에 경복궁 강녕전을 헐어다 중건한 것이다. 9) 대조전 침전 여섯 중에 으뜸은 왕비의 침소인 곤전이다. 곤전은 임금의 정침 바로 뒤에 위치하여 중심되는 자리를 차지한다. 창덕궁의 곤전은 대조전으로, 희정당의 바로 뒷편에 일곽을 구성하고 있다. 경복궁의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희정당을 지을 때 왕비의 침전이던 교태전도 함께 옮겨다 대조전을 지었는데, 고스란히 옮긴 것이 아니라 창덕궁에 적합하도록 그 구조는 새롭게 하였다. 궁내의 다른 전각엔 용마루가 있으나 왕비의 처소에는 용마루가 없다. 따라서 궁의 어디에서나 용마루 없는 지붕이 중궁전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전각 중앙에 자그마한 월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출입할 때 잠시 머물거나 하례 때 의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준비된 것이다. 월대의 정면과 좌우에 돌층계가 설치되어 보도에 이어졌고, 월대 좌우 귀퉁이에는 청동 드므를 설치하였다. 이는 거기에 물을 담아두면 공중에서 내려다본 화마가 제 모습이 물에 비친 데 놀라 화기를 거두어 도망쳐 버린다는 데서 유래된 장치이다. 이곳은 성종·인조·효종·현종·철종·순종 등이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10) 경훈각 대조전 서북쪽에 위치한 경훈각은 현재는 단층 건물이지만 원래는 2층 건물이었으며 위층이 징광루이고 아래층은 경훈각이라 하였다. 세조 7년(1461)에 전각 명칭을 바꿀때에 누상을 징광루, 누하를 광세전이라 하였으므로 그 이전부터 2층 건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로 인조반정 때에 소실되고 또 다시 이듬해에 중건된다. 순조 때 화재가 발생하기 전인 1826년에서 183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알려진 '동궐도'에서는 경훈각이 2층에 청색 기와로 그려져 있으므로 인조 연간의 중건 때에 청기와로 지붕을 이은 것으로 추측된다. 11) 내의원 전의들이 왕과 왕족의 치료를 위하여 머물던 일종의 궁중 의료기관으로, 약방이라고도 부른다. 성정각이 중심되는 건물로, 거기에는 임금 받들기를 지극히 한다는 의미의 '보호성궁' '조화어약' 등의 편액을 높이 달아 두었는데, 정조 어필이다. 전의들은 외상을 입은 사람의 긴급처치를 비롯하여, 비빈들이 산기가 있어 산실청이 차려지면 분만의 일을 맡아 다스리는 등 전공에 따라 각각 소임이 달랐다. 그 중에는 여의관(女醫師)도 있어서 지체높은 부인들의 치료를 담당하였다. 좋은 약재를 전국에서 구하고 부족한 것은 수입하여 증세에 따라 곧 지어서 대령할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고, 전의들은 주야로 대기하고 있었다. 지금은 마당가에 약재를 다루던 돌절구만 남아 있다. 12) 어차고 인정문에서 내의원 쪽으로 올라가는 도중 오른쪽에는 고종과 순종이 사용하던 어연과 주정소(晝停所:국왕의 능행 등 행차때에 잠시 쉬기 위한 용도의 구조물), 외바퀴의 초헌, 마차와 승용차들이 전시된 건물이 있어 승용차의 변화 과정을 실감할 수 있어 흥미롭다. 여기는 본래 내전으로 들어가는 대문이었던 숙장문의 안쪽이며 동시에 편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곳으로 '동궐도'에서는 빈청이라 하였고 『궁궐지』에서는 비궁당이라 하였다. 대신과 비변사 당상관이 국왕을 만나기 위해 모이는 장소이며 때로는 외국의 사신이 임금을 접견하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고 한다. 13) 낙선재 『궁궐지』에서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고 있으나 근래에는 창덕궁에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건물로 창덕궁의 동남쪽에 창경궁과 이웃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승정원 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에 헌종 13년(1847)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된 건물로서 국상을 당한 왕후와 후궁들이 거처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순조 28년(1828)에 건립된 연경당보다 20년 뒤에 세워진 곳으로 궁궐에 조영되는 주거 건축술로서 그 구성의 법식과 보존 상태가 훌륭하며, 특히 지형과 환경에 따라 자유 분방하며 다양한 건축물을 보여 주고 있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14) 영화당 조선왕조에선 옛 제도에 따라 국가의 동량(棟梁)을 뽑는 일을 과거제도에 의존하였다. 공개시험으로 우수한 인재를 발탁하는 방법이었다. 지방에서 초시에 합격한 사람들만 골라 임금이 친히 참석한 자리에서 시험을 치게 하였다. 이를 전시(殿試)라 하는데, 영화당은 그런 과거를 보는 장소였다. 원래 이곳은 임금이 신하들과 꽃구경을 하고 시를 지으며 놀던 곳이다. 정조 때부터 이곳을 과거장으로 사용하여, 영화당에는 시관이, 그 앞 춘당대에는 응시자들이 자리잡고 과거를 보았다. 15) 부용정 영화당에서 과거를 보고 급제를 하면 주합루에 올라가 왕실도서관의 수만 권의 서책을 읽으면서 능력을 함양하게 된다. 그때 그 일을 축수해 주는 자리가 부용정이다. 부용정의 평면은 亞자형이면서 변화를 주어서, 작은 건물이지만 그 구성이 복잡해 보인다. 한쪽의 두 다리를 연못 속에 담그고 섰다. 연꽃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한송이 꽃과 같은 정자를 꾸민 것이다. 정조 때 개건했는데, 구조로 보아 특이한 정자이다. 동쪽에 열린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불발기창이 달린 창과 외짝의 문이 있다. 그 안에 들어서면 단문이다. 필요할 때 문짝을 열어 걸면 온 천지가 한꺼번에 정자 안으로 달려드는 듯하다. 16) 부용지 부용지는 장방형 연못으로 못 가운데에는 직경 9미터의 원형 섬이 조성되어 있다. 원래 이곳에는 숙종 때부터 연못이 있었으며, 1707년 지금의 부용정 터에 택수제가 건립되었던 것을 1792년에 정조가 택수제를 헐고 부용정을 개건한 것이다. 부용정 옆에는 석분위에 아름다운 괴석(怪石)이 심어져 선산을 상징하고 있다. 부용지에는 수련(睡蓮)이 심어져 있고 북쪽의 주합루와 동쪽의 영화당, 남쪽의 부용정이 수면에 오색아롱진 그림자를 드리우면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수 놓인다. 부용지의 수원(水源)은 지하에서 솟아오르며, 비가 올 때는 서쪽 계곡의 물이 용두의 입을 통하여 입수하게 되어 있다. 못 속에는 잉어나 붕어 등의 물고기를 길러 임금이 낚시나 뱃놀이를 했던 곳이다. 동남쪽 호안(護岸)에는 이채롭게 물고기 한 마리가 조각되어 있다. 17) 주합루 정조가 즉위하던 해에 주합루가 완성된다. 실학의 분위기가 팽배하던 시절에 정조는 등극하여 유능한 문신들과 더불어 문치에 노력한다. 임금 자신이 박식하여 많은 저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서책들을 많이 출판하였다. 주합루를 짓고 아래층을 규장각이라 하여 수만 권의 책을 보존하는 서고로 꾸몄다. 여기에서 나라에 진출할 동량들을 육성시켰다. 또한 주합루 주변을 아름답게 가꾸어서 영화당에서 취재된 인재들 양성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주합루 남쪽에 어수문을 짓고 그 앞에 방지(부용지)를 팠다. 방지의 중앙엔 당주(當洲)를 만들고 잘 생긴 소나무를 심었다. 연못에 당주가 있어야 재록(財祿)을 누린다는 설에 따른 것이다. 방지의 서편엔 누각이 있고 지변(池邊)에 입수하는 물을 토하는 이무기 머리상이 있다. 동쪽엔 영화당이, 남쪽엔 부용정이 있다. 18) 애련지 (애련정) 주합루 후원으로 해서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층층다리를 딛고서면 건너편에 방지(方池)가 있고 그 북쪽에 단문의 정자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뜨인다. 애련정이다. 애련정에 들어가 앉으면 난간위로 기둥에 장식한 낙양각이 드리워지는데, 마치 그림틀의 액자 같아서 앉아서 내다보는 경치가 한폭의 그림 같다. 철따라 변하는 기막힌 경관을 여기에서 즐길 수 있다. 연못에 물을 담기 위하여 입수시키는 부분의 석조는 아주 단조로우나 재기(才氣)가 넘친다 19) 연경당 순조 28년 당시의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창덕궁 안에 지은 유일한 민가형식의 건물로, 사랑채의 당호가 연경당이다. 사랑채엔 안채가 이어져 있고 사방에 행각들이 설비되어 있다. 이른바 아흔 아홉간 집의 구성이 완비되어 있어 당시 사대부 주택을 잘 보여주며 한국 주택사나 생활사 등 여러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섬돌 아래 세벌대 댓돌이 있고, 그 앞에 초헌이나 말을 타고 내릴 때 딛는 노둣돌이 있다. 대청은 4칸이며, 툇마루를 놓았다. 동쪽에 2칸의 내루(內樓)가 있어 마루방이 되고, 서편에 4칸의 방이 사랑방이다. 사랑방 머리맡엔 벽장이 있고 다시 다락이 있다. 20) 선향재 연경당에 장성한 아들이 살고 있다면 그 아이를 위하여 교육에 소용되는 여러 가지들을 구비하려고 어른들은 노력한다. 서당의 구비도 그 중의 한 요소가 된다. 수천 권의 책을 쌓아 두고 유능한 스승을 모셔다 열심히 가르치면 영재교육에 손상이 없을 것이다. 선향재는 독서와 서고를 겸한 건물이다. 특히 이 집은 서향하여 여름철이면 석양의 뙤약볕이 따가우므로, 건물 바깥으로 사랑(斜廊)을 설비하여 차양하도록 했는데, 유지(油紙) 바른 차양막을 고패에 걸린 끈으로 잡아당겨 개폐하도록 마련하였다. 또 사랑지붕엔 청동판을 인갑(鱗甲)처럼 박아서 비바람에 견디게 하였다. 21) 관람정 반도지(半島池)라 불리는 연못가에 있는 이 정자는 그 평면이 합죽선(合竹扇)을 편 듯한 모양으로 되어 마루틀이나 지붕틀에서도 평면형태에 따라 곡재를 사용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의 건물이다. 이 정자는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대한제국 말이나 일제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도지의 모양도 19세기 전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역시 많은 변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2) 옥류천 이곳은 창덕궁 후원 속에서 가장 깊은 계원(溪苑)이다. 1636년 인조가 이 계원을 조성했다. 계류는 북악산의 동편 줄기의 하나인 응봉(鷹峯)의 산록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산내와 어정(御井)을 파서 천수(泉水)를 흐르게 하였다. 계류가에는 청의정?소요정?태극정?농산정?취한정을 적절히 배치하고 판석 등으로 간결한 석교를 놓고 어정 옆의 자연 암석인 소요암을 ㄴ형을 파서 곡수구와 폭포를 만들고 암벽에 시문을 새기기도 했다. 정자 앞에는 작은 지당(池塘)도 설치하고 초정(草亭)인 청의정은 수전 속에 건립하여 긴 판석 다리를 거쳐 들어가게 하였다. 이곳은 삼복의 더위에도 물이 차고 숲이 짙어 냉기를 느끼게 하는 공간이다. 주위의 숲은 심산계곡을 연상시킨다. 이 옥류천에 앉아 계간에 피어오르는 운무(雲霧)를 보고 있으면 선경에 들어온 듯 하다. 이 소요암에 곡수구를 파고 폭포를 만든 것은 1636년 인조 때이다. '옥류천'이란 각자는 인조의 글씨이고, '飛流三百尺 遙落九天來 看是白虹起 飜成萬壑雷'의 오언시는 옆에 주기한 '庚子二月 癸未題' 라하여 1690년 숙종의 시를 새긴 것이다. 이 시를 풀어보면 "흐르는 물은 삼백척 멀리 날으고, 흘러 떨어지는 물은 높은 하늘에서 내리며 이를 보니 흰 무지개가 일고 온 골짜기에 천둥과 번개를 이룬다"는 뜻이다. 24) 신선원전 창덕궁에는 조선왕조로서는 최후의 것에 해당하는 신선원전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것은 1921년 순종이 새로 지은 건물로, 창덕궁 서북쪽 아주 깊숙한 자리에 경영되어 있다. 전내는 11실의 감실이 있는데, 제1실에는 태조고성제, 제2실엔 세조, 제3실엔 원종, 제4실엔 숙종, 제5실엔 영조, 제6실엔 정조, 제7실엔 순조, 제8실엔 문조, 제9실엔 헌종, 제10실엔 철종, 제11실엔 고종을 각각 봉안하였고, 각 임금의 생신날에는 차례를 올렸다. 여기 봉안하였던 어진(御眞)은 6.25동란때 부산으로 옮겨졌었으나 화재로 인해 불타버려 지금은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신선원전은 제실, 제기고 등의 여러 부속건물이 있고, 그 앞에는 몽답정 등의 정자와 방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