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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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작성자 강** 작성일 2014-04-04 조회수 1195
* 창덕궁 조선 태종 연간에 있었던 창덕궁 창건은 한양 재천도에 즈음하여 이루어졌다. 태조 3년 10월 한양천도가 있은 후, 정종은 그 원년(1401) 3월 고려의 옛 서울인 개성으로 환도하였고 다시 다음 태종이 즉위하여서 재차 서울에 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창덕궁은 태종이 재천도하면서 창건한 궁이다. 태종 4년에 시작된 공사가 만 일년만에 완공되자 태종은 궁 이름을 창덕궁이라 하였다. 태종 11년에 이르러 진선문 석교(금천교)를 신축하고 태종 12년에 돈화문을 건립함으로써 창덕궁은 완전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창덕궁은 임진왜란까지 인정전 후원 담장 증축과 수문당과 대조전의 중수 등만의 변화만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폐허가 되자 광해군 때 재건을 시작하여 광해군 5년경 완전히 재건하였다. 그후 인조반정때 대화재가 발생하여 인정전만 남는 수난을 당했으나 다시 여러 전각들을 재건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때 새로 지어진 건물로는 대조전, 선정전, 희정당, 정묵당, 집상당, 보경당, 옥화당, 태화당 등이다. 철종 14년(1863) 12월 철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함에 따라 고종은 인정전에서 즉위하였다. 그 후 대원궁에 의해 경복궁이 낙성되고 왕이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함에 따라 이후의 창덕궁은 별다른 수리나 영건이 없었다. 고종 10년 (1873) 겨울 경복궁 자경전의 화재와 함께 왕은 다시 창덕궁에 이어하게 되었으며, 그 후 10년간 이 궁에서 거처하던 중 13년과 14년에 걸쳐 일대 수리를 함으로써 궁궐의 면모는 일신되었다. 그러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치르고 난 왕은 22년 봄 다시 경복궁으로 이어하였다. 그 이후 창덕궁은 왕이 잠시 들리는 일이 있었을 뿐 이렇다할 변천이 없이 지내다가 융희원년(1907) 10월에 다시 순종 이하 왕실 일행을 맞이하여 왕궁아닌 황궁으로의 출발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일제의 침략세력이 궁중을 장악하고 있었을 때이므로 명실상부한 황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융희원년(1907) 8월 경운궁에서 즉위한 순종은 그해 10월에 이어를 위하여 창덕궁의 수리를 명하고 11월에 창덕궁으로 이어하였지만 궁중은 일제 침략자들이 무상출입하는 장소로 되었다. 인정전, 희정당, 주합루 등의 건물에서는 수시로 이또오 이하 저들의 접견 향응에 제공되었고 비원에서는 학생들의 운동회가 열리기도 하였으니, 전일 궁중의 위엄은 다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융희4년 (1910) 8월에는 매국노 이완용 등이 총감 데라우찌의 지시에 따라 우리나라를 일본에 합병하기로 정한 다음 이 창덕궁에서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고 황제를 핍박하여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황제에게 양여한다는 조서에 옥새를 빼앗아 누르니, 오백년 왕궁의 창덕궁은 순종이 ‘창덕궁전하’라는 칭호로 여생을 보내는 비운의 궁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