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 | |||||
작성자 | 강** | 작성일 | 2014-04-04 | 조회수 | 1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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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동에 있는 공원. 사적 제354호.
탑동공원(塔洞公園)?파고다공원이라고도 하였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봉화의 불이 붙여진 유서 깊은 곳이다. 고려시대 이곳에 흥복사(興福寺)라는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1464년(세조 10)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던 세조가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고 중건하였는데, 이 공사를 위하여 동원된 군사는 2,100인이었고, 13인의 부장이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근처의 가옥 200여 호를 철거하여 3년 후에 완공된 이 사찰의 규모는 굉장한 것이었고 도성 안 제일의 대가람이었다. 이 절은 당우나 문루의 규모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특히 전국에서 동 5만 근을 모아 주조한 대종과 1468년에 완성하여 그 안에 석가여래의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을 안치하였다는 10층석탑이 있었다.
비교적 숭불정책이 시행되던 것이 성종 때 들어와서는 철저한 억불정책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연산군대에 들어가서는 더욱 가혹하여졌다. 원각사를 철거하자는 논의는 1504년(연산군 10)에 시작되었지만 당장에는 철거하지 않았고, 그 대신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이 자리에 옮겨 전국에서 뽑아 올린 기생 1,200여 인과 악사 1,000인, 감독 40인이 기거하는 연산군의 기생방이 되었으며, 그 이름도 연방원(聯芳院)으로 바뀌었다.
연산군이 실각한 뒤 이 건물은 잠시 한성부 청사의 일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14년(중종 9) 호조에서 원각사의 재목을 헐어 여러 공용건물의 영선에 쓸 것을 계청하자 왕이 이를 허락한 뒤 얼마 안 가서 이 사찰건물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비와 10층석탑만 남아 있다.
탑골공원이 언제 공원으로 개설되었는지에 관하여서는 정설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일성록 日省錄≫ 등의 관찬기록에는 물론이고, 그 밖의 사료에도 전혀 그에 관한 기록이 전하여 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파고다공원이 이 땅에 최초의 공원이고 1897년 총세무사 브라운(Brown)의 건의에 의하여 꾸며졌다.??는 기록은 적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일본인이 저술한 ≪경성부사 京城府史≫ 제1권에 ??고종시대 광무 초년에 …… 실로 경성에 있어서의 최초의 공원??이라고 기술된 것이 1897년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공원으로 둔갑하여 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최초의 공원은 인천 각국공동조계 안에 1889~1890년에 개설된 만국공원이며, 파고다공원이 총세무사 브라운의 건의로 개설되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1896년이나 그 전해인 을미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광무 초년, 즉 1897년 하반기에는 총세무사 브라운은 그 자리에서 해고당한 뒤여서 공원개설을 건의할 겨를도 없었고, 그러한 권한도 없었기 때문이다. 파고다라는 이름의 유래에도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즉, 브라운이 이곳을 공원으로 할 것을 건의할 때 ??탑이 있는 공원??이라는 뜻에서 Pagoda Park로 부를 것도 같이 건의하였을 것이라는 설과, 백탑(Pagtab)이라는 음이 전화하여 파고다가 되었다는 설이다.
이렇게 공원이 된 당초에는 공지에 간단한 울타리를 두르고 수십 그루의 나무를 심고 벤치를 갖추어 놓은 정도로 출발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0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이 공원의 관리권도 총독부로 넘어갔고, 총독부에서는 매년 평균유지비 2,171원 50전씩을 투입하여 정자?의자?화단?연못?회유도로?전등?수도?온실 등의 시설을 하였으며, 벚나무와 상록수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한국군의 군악대를 조직, 육성하기 위하여 독일인 에케르트(Eckert,F.)가 내한한 것은 1900년 가을이었는데, 그 해 〈군악대설치령〉이 공포되었다. 파고다공원 서쪽 부지 일부에 군악대건물이 세워져 군악대가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은 1902년이었다.
1907년 7월 통감부의 명령으로 이 군악대가 해산되자, 이 건물은 폐옥처럼 방치되다가 1919년 9월부터는 경성도서관으로 사용되었다. 광복 이후까지 파고다공원의 면적은 1만1003㎡였으며, 도서관 부지는 1,637㎡였다.
탑골공원이 우리 민족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정신적 재산인 것은 이곳이 3?1운동의 발상지라는 점이며, 일제강점기에 시민들이 울적하여진 심정을 달래기 위하여 으레 이 공원을 찾았다고 한다. 광복 직후의 사건으로 특기할 것은 땅에 내려져 있던 백탑 상층 3개 층을 들어올린 일이다.
이 상층 3개 층이 땅에 내려앉게 된 원인에 관하여서도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탑을 일본으로 가져가려다가 3층까지 내리고는 너무 무거워서 그냥 두었다는 설과, 연산군이 한창 폭정을 할 때 창덕궁에서 내려다보면 탑의 상층부 3개 층이 반드시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내려놓았다는 설 등의 견해가 있으나, 모두 정설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 상층부 3개 층은 1946년 2월 17?18일 양일 간 당시 우리나라에 진주하여 있던 미 24사단 소속의 공병대에 의하여 기중기로 상층에 올려져 원상태로 복원되었다. 이 공사 때에는 장안의 구경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1967년에 시작한 이 지역의 재개발사업으로 종로도서관은 사직공원 옆으로 신축, 이전되었으며, 공원 서편에는 파고다아케이드라는 상가를 만들어 그 모습을 크게 바꾸었으나 1980년대 초 이 아케이드는 철거되고 공원 내외부가 말끔히 단장되었다.
≪참고문헌≫ 서울六百年史 4(서울特別市史編簒委員會, 1981), 韓國開港期都市社會經濟史硏究(孫禎睦, 一志社, 1982).
<탑골공원팔각정(塔-公園八角亭)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 탑골공원에 있는 조선시대 말기의 팔각 정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3호.
현재 공원 한복판에 위치해 있으며 5단의 층단식 석축 기단 위에 마루를 깔지 않고 직접 기둥을 세운 구조로 되어 있다.
탑골공원은 고려시대에 흥복사(興福寺)란 절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1467년(세조 13)에 원각사(圓覺寺)를 세운 곳이기도 하다. 연산군 때에는 절이 폐사되고 그곳에 궁중의 가무(歌舞)를 담당하던 장악원(掌樂院)이 들어서기도 하였다.
그 후 주변의 민가에 화재가 발생하여 줄곧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지금부터 100여년 전 고종 임금 당시에 총세무사(總稅務司)로 있던 외국관리 브라운(Brown,J.M.)이 공원으로 꾸밀 때 이 정자도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를 기념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건물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서울名所古蹟(金永上, 東亞出版社, 1958), 鐘路區誌(鐘路區,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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