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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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흥궁(龍興宮)
작성자 강** 작성일 2014-03-25 조회수 943
* 용흥궁(龍興宮) 고나청리 441번지는 강화 도령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던 집이다. 원래는 보통의 민가였으나 철종이 왕위에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철종 4년(1853)에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했으며, 고종 때(1903) 청안군 이재순이 중수했다. 현재 건물은 내전과 외전?별전이 각각 1동씩 남아 있고,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潛邸]이라는 잠저구기비각(潛邸舊基碑閣)이 서 있다. 넓지 않은 고샅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두어 이중의 건물로 되 있는데, 창덕궁의 연경당과 낙선재처럼 살림집의 유형을 딴 소박하고 질박한 기풍이 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흩처마에 팔작지붕이고 주심포 양식을 취했다. 어릴 적 이름이 원범(元範)인 철종은 영조의 고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다. 정조대왕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이 할아버지, 전계군(全溪君)이 아버지이다. 증조할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이고, 할아버지 은언군은 아들 상계군(常溪君)이 반역을 꾀했다 해서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인이라 하여 죽음을 당하니 이때 은언군도 목숨을 빼앗긴다. 아버지와 형 원경(元慶)은 이원덕과 민지용이 원경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모반을 꾸미다가 발각되어 사사되었다. 이때 원범의 나이 14세였다. 원범이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어 온 것은 11세 때이며, 왕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부모와 형제, 친척들이 당하는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였던 원범. 역사는 철종을 단지 농사만 짓던 아이라고 무식하다 치부하지만, 철종은 혹여 왕이 될 재목은 아니었지만, 무지렁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제 신분을 노출하고는 목숨조차 옳게 부지하기 어려웠을 터이니 왕가의 신분은 땅속 깊숙이 묻어 두고 자랐을 터이다. 철종의 나이 19세 때(1949),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6촌안에 드는 왕족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헌종의 7촌 아버지뻘 되는 강화도의 나이 어린 강화도의 어린 농사꾼 철종이 돌연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철종이 즉위하자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이미 순원왕후가 계획했던 바였으며, 순원왕후는 서둘러 친정 조카뻘인 김군근의 딸이 철종의 비(妃)로 책봉하니 이때부터 철종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희생물이 되었다. 세도정치의 폐단은 삼정의 문란으로 이어졌으며, 1862년 봄 민주민란을 시작으로 삼남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철종은 삼정이정청을 임시기구로 설치하여 삼정의 악습을 제거하는 정책을 수립하는 등 민란 수습에 전력을 기울이지만 민폐의 도는 이미 극에 달해 민란은 동학운동으로 확산된다. 수습할 길 없어 고뇌하던 철종은 가장 밑바닥 인생에서 왕위에 오른지 14년 6개월 만인 33세의 젊은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뜨고 만다. 철종은 원래 오막살이 초가집에서 살았으나 임금이 나왔다 해서 용흥궁(龍興宮)이라 부르고 크게 다시 지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9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