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강화성당 | |||||
작성자 | 강** | 작성일 | 2014-03-25 | 조회수 | 12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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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회 강화성당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11호.
강화성공회는 여러 면에서 강화도의 역사적 성격에 어울린다. 성공회의 사상이 그렇고 강화성공회의 시작과 건축양식과 현 존재의 모습이 그렇다. 엄밀히 말하면 성공회는 정통 개신교도 아니고 정통 천주교도 아니다. 오히려 그냥 범 기독교에 속할 뿐이다.
강화성당은 광무4년(1900) 대한성공회 초대주교인 코프주교에 의해 건립되었다. 1889년 코프씨가 영국에서 한국주교로 서품을 받으면서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시작된다. 코프씨는 7년 뒤인 1896년 6월 강화에서 한국인 신자에게 세례를 주고 그로부터 4년 후 대한성공회로서는 가장 먼저 강화에서 이 성당을 건립했다. 성공회는 조선반도에 들어오면서부터 철저히 조선문화와의 조율을 고려하며 들어왔다. 무분별하게 공격적으로 포교하기보다는 토착적 전통과 충분히 대화해 이해의 폭을 넓히기를 원했다. 그것은 성공회 그 자체의 성격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보다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양자를 다 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중용의 성격을 가진 영국성공회는 조선선교의 거점을 물색하다가 3가지 이유로 강화도를 선택한다. 하나는 강화도에는 아직 미국 장로교나 감리교단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어서 마찰을 피할 수 있고, 두 번째는 역사적으로 수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문물들이 왕래하여 포용적인 성공회와 어울리며, 마지막은 강화도가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울 때 왕실의 보장지처였으며 개인들의 피신처였고 정치적 유배지여서 성공회의 이상을 펼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성공회의 토착적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곳이 바로 강화도 성당이다.
강화성당은 전통적인 조선 한옥 구조물에 서양의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수용해 지은 것으로, 겉모양은 영락없는 전통조선집에 사찰양식인데, 내부구조는 기독교의 전통 예배공간인 서양식으로 꾸민 것이다. 정교하고 반듯하게, 크고 작은 돌을 차분히 엇물려 비교적 높은 석축으로 축대를 쌓고, 마치 궁궐의 담처럼 한가롭고 단출하게 담을 둘렀다. 성당의 입구인 솟을삼문 역시 한옥의 빗장문인데, 정문에도 곁문에도 빛 바랜 태극무늬가 선명하다. 정문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오래 된 사찰에 온 느낌이다. 커다란 사찰양식의 범종과 종각이 있고, 본채 건물이 길게 꽁지를 빼고 서있다. 4칸의 짧은 면을 정면으로 삼고 10칸의 긴 면을 측면으로 삼은 것이 색다르다. 본채 앞면에는 내리쓴 주련이 기둥마다 걸려 있는데 영락없이 사찰의 모습을 본뜬 것이다. 이층집에 팔작지붕을 이루고, `천주성전`이라는 편액을 달았는데 이 역시 사찰의 `대웅보전`편액이 놓이는 자리이다. 다만 앞지붕 꼭대기에 십자가를 꽂은 것이 외관상 다르게 보이는 점이다. 성당내부는 측면10칸 중 8칸은 예배실, 나머지2칸은 성의실 등으로 구성했다. 기독교 건축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경사지의 대지를 석축으로 쌓고, 입구와 계단, 외삼문?내삼문?성당?사제관을 모두 동남향으로 배치하여 배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전체의 외부 공간 구성은 그대로 구릉지에 형성된 사찰의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다. 이 건물은 경복궁을 건축한 목수가 지었다고 한다. 이 건물의 구성 요소들은 모두 초창기의 한국 성공회선교사들이 토착화를 위해 노력한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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