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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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작성자 강** 작성일 2014-03-25 조회수 814
* 외규장각 조서시대 때도 고려궁터에다 행궁을 짓고 임금이 난을 피해 머물렀다. 외규장각도 행궁 안의 여러 건물들 사이에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외규장각을 비롯한 강화행국이 완전 폐허가 된 것은 1866년 병인양요 때이다. 프랑스군은 귀중한 책들과 금은괴 등을 모두 약탈해 가고 남은 건물까지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강화행궁을 완전 P허로 만들어 놓고서야 떠났다. 정조 8년에 편찬된 『규장각지』에 의하면 외규장각은 강도행궁의 동쪽, 장녕전(長寧殿) 서쪽에 6칸의 규모로 있었다고 전한다. 조선왕조는 전란에 대비하여 국서(國書)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일에 매우 고심하였다. 그래서 춘추관?성주?전주 등지에 사고(史庫)를 마련하고 실록 등을 분산해 보관하였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전주사고와 강화사고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타 없어졌다. 이에 강화부가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 전주사고의 책들을 선조 28년(1595)에 모두 강화부로 옮겨왔다. 그 후 정유재란(1597) 때는 영변 보현사로, 선조 36년(1603)에 다시 강화부 마니산으로 옮겨왔으나 병자호란(1636)을 맞아 책의 일부가 수난을 겪는다. 효종은 북벌계획을 세우면서 강화도에 별고(別庫)를 설치하고 역대 임금의 유물들을 행궁이 세워졌던 현재의 고려궁터에 보관했으며, 현종 원년(1659)에는 정족산성 안에 사각(史閣)을 짓고 서책을 옮겼다. 숙종은 1679년 강화 바닷가에 돈대 설치 작업을 하면서 한편으론 왕실족보인『선원록(璿源錄)을 편찬케 한다. 그 동안 붕당세력이 비대해져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겠다는 의지였다. 숙종 21년(1695) 강화유수 김구(金構)가 행궁 동쪽에 장녕전을 세우고, 숙종이 어필(御筆)과 서액(書額)을 내렸으며, 이미 편찬된『선원록』과 임금의 화상[御眞] 등을 이곳에 보관했다. 정조 때에 이르러 경기?충청?황해의 삼도 수군을 통솔하는 통어영이 강화로 옮겨오면서 r아화는 군사 요충지로 한층 격상되었고, 사고의 안전성도 그만큼 높아졌다. 이어 정조 6년(1782)에는 행궁 동쪽에 외규장각을 준공하고 지금까지 강화내에 분산되어 있던 책들과 왕실의 족보?어필?어재?옥인?금보 등을 비롯ㅎ, 서울 궁성으로부터 다수의 의궤?옥책(옥돌에 새긴 책)들을 옮겨왔다. 이로써 외규장각은 포화상태가 될 만큼 귀한 자료들로 가득 찼다. 하나 와실관계 기록보관소로 온갖 자룓르이 보관되어 있던 외규장각은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침입한 병인양요를 맞아 한꺼번에 큰 피해를 당하고 말았다. 프랑스인들은 특히 궁전과 외규장각에 관심을 갖고, 옥책과 은괴 149상자를 비롯해 귀중한 보물이다 싶은 것은 죄다 배에 실어 본국으로 빼돌렸다. 서책 1천여 종 6천 책 중에서 200여 종 340책을 약탈했다. 현재 일부 책들은 프랑스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