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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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사(客舍)
작성자 강** 작성일 2014-03-24 조회수 678
※객사(客舍) 객관(客館)이라고도 한다. 자료상으로는 1279년(충렬왕 5) 8월부터 지었다고 하나, 사신이 묵은 것은 고려 초부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으며, 외국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 전주객사처럼 특별한 곳은 임금이 직접 쓴 편액을 내리기도 하였다. 때문에 관찰사가 일을 보는 동헌보다 격이 높았으며, 관리는 이곳에 머물면서 교지(敎旨)를 전하기도 하였다. 구조는 본사(本舍)를 중심으로 좌우에 익사(翼舍)를 두고, 앞면에는 내(內) ?중(中) ?외(外) 3문이 있으며, 옆에 아영청(亞營廳) ?무신사(武臣祠) 등 부속건물을 두었다. 본사는 기와와 돌을 깔고 좌우의 익실은 온돌을 깔았다. 특히 전주객사의 경우, 대청을 양청(凉廳), 방을 오실(澳室)이라 하였는데, 이 두 구조가 공존하면 오량(澳凉)구조라 하였다. 이 구조가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지역에 따라 다르며, 남쪽은 대부분 임진왜란 뒤에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아전이 관리하였는데, 고려 때에는 객사사(客舍史)라는 아전이 담당하였다. 일제 때 조선시대의 관청들을 없애버린다는 식민지정책에 따라 많은 객사가 불하되고, 다른 목적으로 쓰이면서 구조상의 변형이 있었다. 남아 있는 객사는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으로, 강릉의 객사문(客舍門:국보 51), 전주객사(보물 583), 고령의 가야관(伽倻館), 경주의 동명관(東明館) 좌우 익실 등은 조선 전기에, 통영객사 ?여수객사 등은 조선 후기에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