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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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작성자 강** 작성일 2014-03-24 조회수 921
※진흥왕의 생애 신라 제 24대왕 지증왕의 손자로 법흥왕의 아우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이며 왕비는 박씨로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왕태후 김씨가 섭정하였다. 신라의 대외적 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킨 왕이다. 활발한 정복사업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기반이 되었던 한강유역을 차지하였고 아울러 가야를 완전히 병합시켰다. 아울러 대내적으로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으며 거칠부를 시켜 ??국사(國史)??라는 역사서를 편찬케 하였다. 또한 나중에 신라의 삼국통일에 있어 큰 원동력이 되는 화랑도 역시 창설하였다. 재위 37년만인 576년에 43세로 죽었다. 애공사(哀公寺) 북봉에 장사지냈다. ※영토확장 1. 대가야 병합 진흥왕은 법흥왕의 가야에 대한 정복사업을 계승하여 낙동강 유역까지 정복의 손을 뻗쳤다. 진흥왕 16년(555)에는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에 하주를 설치하였다. 창녕은 본래 비화가야(非火伽倻)라는 가야연맹의 한 세력이었는데 이즈음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므로 이에 하주를 설치하여 신라의 행정 ? 군사적 지배를 받게 했던 것이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그 유역에 형성되어 있던 가야연맹 중에 제일 하류지역에 속한 금관가야는 법흥왕대에 이미 병합했으며 이제 중류지역으로 올라와 가야연맹의 중앙부를 장악함으로써, 수년 후 후기 가야연맹의 맹주인 고령(高靈)의 대가야(大伽倻)를 정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이 지역의 병합으로 얻은 인적 ? 경제적 자원이 만만치 않았음은 물론이다. 진흥왕 23년(562)에 백제가 신라의 변경을 침략해오자 신라가 반격하여 백제군 1천 여명을 죽인 일이 있었고, 이어 두 달 후 신라는 현재의 고령지방의 대가야가 반란을 꾀한다는 구실로 대군으로 기습하여 멸망시키고 드디어 가야연맹을 완전히 신라의 영토에 편입하였다. 2. 한강유역 확보 진흥왕은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과 금현성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듬해 병부령으로 임명된 이사부로 하여금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이렇게 확보된 한강하류유역의 전초기지를 기반으로 그 해에 백제의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553년에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 하류 유역의 전략적인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를 기습 공격하여 이 지역을 탈환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유역을 전부 차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지역의 통치를 위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김무력(金武力)을 초대 군주로 임명하였다.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하류유역을 탈취한 사건은 백제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결혼동맹의 파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물적 자원의 획득 이외에도 황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였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