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진흥왕 척경비 | |||||
작성자 | 강** | 작성일 | 2014-03-24 | 조회수 | 11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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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진흥왕 척경비
지정번호 : 국보 제33호
소 재 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지 정 일 : 1962. 12. 20.
시 대 : 신라 진흥왕 때
크 기 : 최대 높이 1.78m, 최대 폭 1.75m, 두께 약 0.3m
분 류 : 비석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에 있는 신라 진흥왕 때의 순수비(巡狩碑)이다.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진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화강석제의 최대 높이 1.78m, 최대 폭 1.75m, 두께 약 0.3m이다. 비는 자연암석을 이용하여 대석(臺石)이나 개석(蓋石)을 사용하지 않은 삼국시대 비석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1면을 간 다음 외연(外緣)에 비석 형상을 따라 윤곽선을 돌렸는데, 우상부(右上部)는 암석이 사면(斜面)을 이루고 있으므로 1행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있다.
비문은 27행인데 1행의 자수는 일정하지 않으며 끝 행은 3자뿐이고 우반부(右半部)에서는 위에서 2행마다 1자씩 낮추어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른 3개의 진흥왕 순수비의 내용과 같이 순수의 사적(事蹟)과, 수가인물(隨駕人物)의 열기(列記) 등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인물의 열기는 속부(屬部) ?인명(人名) ?관직(官職) ?직위(職位)를 표기하여 삼국시대 신라비문의 통식을 따르고 있으며, 해서체로 자경(字徑)은 4cm이다.
전반이 마손되어 자획이 불분명한 점이 있으나 한반도에 전하는 비석으로는 가장 오랜 것이다. 건립연대는 비문에 보이는 '辛巳年二月一日立'으로 미루어 561년(진흥왕 22)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척경비는 본시 창녕군 창녕면 화왕산록(火旺山麓)에 있던 것을 192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건립연대는 561년(진흥왕 22)로 추정되며, 이로 보아 그 이전에 신라가 비화가야(非火加耶:지금의 창녕)나 아라가야(阿羅加耶:지금의 함안)를 영향권에 넣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은 건립연월을 새긴 제기(題記), 기사(紀事), 진흥왕의 창녕행차시에 모인 신하들을 열거한 수가인명(隨駕人名)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갈문왕?대등(大等) 등 중앙 귀족들을 비롯하여 영역확보를 위한 전진기지의 군사령관인 사방군주(四方軍主)?당주(幢主)?촌주(村主) 등이 나타나 당시 신라의 지배체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진흥왕순수비의 위치는 당시 신라의 영토 경계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비문 중에 나오는 '짐'(朕)?'제왕건호' 등의 용어는 신라의 당당한 자존의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과거 일본인들은 마운령비와 황초령비가 고려시대 윤관의 9성 축조 때나 조선 초기의 북방개척 때 원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는 전혀 근거 없는 견해이다. 고려 고종 때의 승려 천인(天因)의 〈고석정기 孤石亭記〉에서 진흥왕의 비석이 철원 남쪽 30리 지점인 고석정 부근에 있었다고 언급한 것도 진흥왕의 또 다른 비가 철원 근방에 있었을 가능성을 말할 뿐 비가 옮겨졌다는 견해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 실제로 진흥왕대에는 활발한 영토확장과 함께 많은 비가 세워졌는데 단양 신라 적성비도 그중 하나이다. 또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신라 관직과 왕의 근시집단의 직명이 새겨진 비석이 조선 숙종 때 지금의 동래에서 발견된 적이 있는데 이 역시 진흥왕의 또 다른 순수비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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