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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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갑리 고인돌군
작성자 김** 작성일 2014-02-03 조회수 889
?상갑리 고인돌군 지정번호 : 사적 제 391호 소 재 지 : 아산면 상갑리 일대 고창의 고인돌군은 고창읍 죽림리와 아산면 상갑리 일대의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에 걸쳐 표고 15~50m 내에서 군락을 이룬다. B. C.400~B. C.100년경(청동기시대 말~초기철기시대)까지 이 지역을 지배한 청동기시대 족장의 가족묘역이다. 지석묘의 총수가 5만여 평에 1,000기 이상으로 추정되나 1990년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지표조사 결과 북방식 3기, 지상석곽식 44기, 남방식 251기, 기타 불명이 149기로 전체 447기가 확인되었으나, 조사이전의 파괴된 기수를 합하면 대략 1,000여기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든 고인돌에는 일련 번호를 써놓았다. 크기는 길이 1m 미만에서 최대 5.8m에 이르며 3m 미만이 80%, 3m 이상이 20%, 4m 이상이 21기로 그중 6기는 5m가 넘는다. 이러한 밀집분포는 우리나라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밀집된 것으로서 한반도의 청동기시대 묘제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당시인들의 정신상, 사회상, 문화상, 묘제상 등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그 숫자의 방대함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식, 이른바 북방식이라 불리는 탁자식, 여러 매의 벽석이 지상에 노출된 지상석곽형, 남방식인 바둑판식 등 다양한 형식이 분포되어 있어 우리나라 고인돌의 기원 및 성격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고인돌 변천사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죽림리?상갑리 일대 고인돌 유적은 동양의 거석문화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지석묘 군은 족장세력은 청동기 시대 농사를 기본으로 한 족장 내지 부족체제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전에 살았던 빗살무늬 토기인이 강가에서 생활했던 것과는 달리 낮은 야산과 비옥한 터전인 이곳 고창의 죽림, 아산 상갑을 찾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창 고인돌 군은 당시인들이 주검을 묻기 위해 마련한 묘제로서 큰 규모의 돌로 축조할 수 있었던 축조방법 및 기술, 대규모의 밀집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등은 매우 신비스럽고 중요한 것으로 파악된다. 고창의 고인돌군은 2001년 1월에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종묘, 팔만대장경, 불국사와 석굴암, 창덕궁, 수원성과 더불어 6번째의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읽을거리 《고인돌의 형식》 고인돌의 종류와 형식은 대부분 겉모습의 차이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각 지역의 독자적 전통과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고인돌들이 지역별로 비슷한 모양을 갖기 때문에, 한때는 북방식<ㅁ자, ㄷ자, 二자>, 남방식<일지석식(一支石式), 다지석식(多支石式), 무지석식(無支石式)>으로 구분한 적도 있으나, 이후 북방식이 한반도 남부인 전라북도 장수와 고창에서까지 발견되고, 북한과 요동반도에서 수많은 남방식 고인돌이 보고되면서부터는 대개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무지석식)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굄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남방식(南方式)을 지석식(支石式)과 무지석식(無支石式)으로, 다시 매장시설(埋葬施設)인 무덤방의 위치에 따라 지상(地上), 지하(地下), 반지하(半地下)로, 그리고 지하 매장시설에 따라 돌널(石棺), 돌덧널(石槨), 나무널(木棺), 독널(甕棺), 구덩널(土壙)로 세분(細分)하기도 한다. 북방식 고인돌은 지상에 4개의 판돌을 세워 장방형의 돌방(石室)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어 놓은 것이다. 그 겉모습이 탁자의 형태로 이 명칭을 따서 탁자식이라 불려지고 있다. 돌방 뚜껑의 유무와 돌널. 돌방. 덧널 등 돌방의 구조, 그리고 돌방의 수 또는 학자들의 분류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며, 유해가 매장되는 돌방을 지상에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 뚜렸한 특징이다. 돌방의 긴변에 세운 두 개의 받침돌은 거대한 뚜껑돌의 무게를 직접 받고 있으므로 두꺼운 판석을 사용하고 있 <고인돌 분포도> 으며, 하부는 땅 속에 깊이 뭍혀 돌방 내부 바닥보다 훨씬 뿌리가 깊다. 또한, 밀뿌리의 형태는 되도록 지하에 깊이 박을 수 있도록 삼각형이나 반달형을 이루고 있다. 돌방의 짧은 변에 세우는 받침돌은 긴 변 받침들 내부에 들어와'ㅁ'모양으로 세워진다. 이 짧은 받침돌들은 뚜껑돌의 중량을 직접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입구를 여닫기가 비교적 용이하다. 그러나 북방식 고인돌 중에는 네 개의 받침돌 중 한두 개가 없어진 경우도 많다. 돌방 내부 바닥에는 자갈이나 판석을 깐 것도 있으나, 그냥 맨땅으로 된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돌방 바깥쪽에 돌을깐 경우는 거의 없다. 분포지역을 보면 대동강, 임진강, 북한강 등 큰 강의 상류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으며 그 남쪽 한계선은 대체로 수원. 용인에서 북한강 유역을 연결하는 선으로 되어 있으나, 예외로서 전북 고창에서 발견된 예가 있다. 남방식 고인돌은 매장시설의 주요부분인 돌 방이 지하에 있다는 점에서 돌방이 지상에 있는 북방식과는 우선 그 형태면 에서 구분되고 있다. 돌 방은 판석, 활석, 냇돌 등을 이용하여 지하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뚜껑 돌을 올려놓은 것으로, 청동기 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걸쳐 유행한 거석분묘이며 만드는데 크기는 일정하지 않다. 지하 널방의 구성은 여러 가지 방법이 사용되어왔으나, 이들은 반드시 그 윗면을 덮는 자신의 뚜껑을 가지고 있다. 뚜껑으로는 판석을 이용하기도 하였으나 나무로 만든 뚜껑을 덮었을 가능성도 많다. 남방식 고인돌은 평지나 구름 위에 분포하고 있으나, 때로는 좁은 평지가 있는 계곡 사이나 산의 경사면 또는 산정상부에서도 발견되고 있는데, 대개 일정한 형식이 없이 거대한 뚜껑돌을 구하기 쉽고 운반하기 용이한 곳을 택하고 있다. 그래서 고인돌은 그 당시 인국문제, 뚜껑돌의 채석이나 이동문제에 따른 사회적. 경제적 및 정치적인 측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남방식 고인돌은 주로 영남과 호남의 한반도 남부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개석식 고인돌은 한반도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고인돌로서, 땅 속에 무덤 방을 만들고, 무덤 방 뚜껑으로서 커다란 돌만이 올려져있는 고인돌을 말하는데, 지표면에는 굄돌이나 받침돌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 대부분 지하에 무덤 방이 들어있지만, 지상이나 반 지하에 무덤 방을 만들고 그 주변에 흙이나 돌을 쌓아 나지막하게 봉분(封墳)을 만들고, 그 봉분 꼭대기에 덮개 돌을 올려놓는 지상 또는 반지하 구조도 있어, 돌널무덤(石棺墓, 石箱墳)과 비슷한 점이 많다. 돌널무덤과의 가장 커다란 차이점은 얇은 뚜껑 돌이 아니라, 두껍고 커다란 덮개 돌이 지표면에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굄돌이나 받침돌이 없기 때문에 고인돌(支石墓) 대신에 큰돌무덤(大石蓋墓)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대부분 반쯤 땅속에 파묻혀있어 자연석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덮개 돌 아래에는 판석이나 돌덩어리를 쌓거나 구덩이만 파서만든 무덤 방이 들어있으며, 그 안에서 탁자식 고인돌과 바둑판식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돌단검(磨製石劍)과 청동기가 발견되어 모두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고인돌이라는 알 수 있었다. 이 개석식 고인돌은 덮개 돌의 가공상태와 주변상황, 그리고 입지조건이 여느 자연석과는 다르기에 고인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개석식 고인돌의 대표적인 전형을 보여주는 충북 제천 황석리에서는 수십 여기의 개석식 고인돌들이 강 옆의 충적대지에 강줄기와 같은 방향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덮개 돌의 모양은 대체로 알꼴(卵形), 베개꼴(長楕圓形), 긴네모꼴(長方形) 등으로 제각각이며, 길이 2~3m, 두께 30~50cm 정도로 낮은 높이의 길쭉한 판석들로서 배 모양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