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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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무장객사
작성자 김** 작성일 2014-02-03 조회수 902
?고창 무장객사(高敞茂長客舍) 지정번호 :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 34호 소 재 지 : 전북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56 시 대 : 조선시대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 34호로 지정되었다. 무장현(茂長縣)에 내려온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1581년(선조 141) 건립되었다. 일반적으로 객사는 주관(主館)과 좌우 익헌(翼軒)으로 구성된다. 주관은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현의 수령과 대소관헌이 모여 대궐을 향하여 배례하던 곳이고, 익헌은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주관보다 지붕을 낮게 하여 격식을 갖추었다. 건물은 높이 82㎝의 돌 축대 위에 있으며 축대 가운데로 난 계단에 호랑이, 구름무늬 등을 새겼다. 주관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주춧돌을 아랫부분은 네모나게 윗부분은 반원형으로 다듬고 둥근 기둥을 올렸다. 그밖에 외대문?중문?좌우 익랑이 있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다. 면사무소로 사용하면서 일부 변경된 것을 1990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읽을거리 《객사(客舍)》 고려?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館舍). 객관(客館)이라고도 한다. 『고려사』에 충렬왕 5년 8월에 객관을 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객사는 고려 후기에 와서야 있었던 것으로 알기 쉬우나, 고려 초기부터 있었음이 확실하며, 외국사신이 내왕할 때 객사에서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객사에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향망궐배(向望闕拜)하는 한편,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였다. 특히, 명나라와 통하는 연변에는 우리 사신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 오는 사신도 묵었기 때문에 건물보수 등 어려움이 많아서 인근 고을의 사람들을 동원하는 일이 때때로 있어서 폐단 또한 적지 않았다. 건축구조는 중앙에 직사각형 평면의 맞배집으로 주관(主館)을 삼고 좌우의 지붕을 한 단 낮추고, 지붕끝은 팔작지붕으로 된 양 익사(翼舍)를 붙여지었으며, 정당은 기와와 돌을 깔고 좌우의 익실은 온돌로 하였다. 이와 떨어진 곳에 고직사(庫直舍) 등의 부속 건물을 지었는데, 건축양식은 익공식(翼工式)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관에는 임금이 계시다는 표시로 궐패를 두고, 양 익사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관원들이나 외국의 사신들이 머물렀다. 객사는 주로 전주(全州)객사처럼 도성의 중앙부나 밀양(密陽)객사처럼 경치 좋은 강변에 두었으며, 흔히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은 객사에는 누(樓)를 크게 짓고 주위 경치를 감상하였다. 현존하는 객사건물로 조선 전기의 것으로는 강릉의 객사문(客舍門, 국보 제51호), 전주객사(보물 제 583호), 안변객사의 가학루(駕鶴樓, 1493), 고령객사의 가야관(伽倻館, 1493), 경주객사의 동경관(東京館) 좌우 익실(16세기말) 등이 있고, 후기의 것으로는 성천객사 동명관(東明館)의 강선루(降仙樓), 통영객사, 여수객사 등이 남아있는데, 조선시대의 목조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객사는 각기 명칭을 가지고 있는데 평안도의 예를 들면 중화(中和)객사는 생양관(生陽館), 순안(順安)객사는 안정관(安定館), 숙천(肅川)객사는 숙녕관(肅寧館), 안주(安州)객사는 안흥관(安興館), 가산(嘉山)객사는 가평관(嘉平館)이다. 이들 객사는 아전들이 맡아 관리하였는데, 고려 때의 예를 보면 지방에 두었던 잡직(雜職)의 하나로, 객사사(客舍史)라 불리는 아전이 담당하였다. 1018년(현종 9)에 각 고을의 아전 수를 정할 때 1천정(丁) 이상의 군에는 객사사 4인, 5백정 이상의 군에는 2인, 3백정 이상의 군에는 1인씩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