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읍성 | |||||
작성자 | 김** | 작성일 | 2014-02-03 | 조회수 | 8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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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高敞邑城)
지정번호 : 사적 제 145호
소 재 지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126
시 대 : 조선시대 초기
고창읍성은 전북 고창군 고창읍에 있는 조선 초기의 성으로,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때 고창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국난호국을 위한 국방 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1965년 4월 1일 사적 제 145호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가 4-6m, 면적은 50172평으로 동, 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의 치성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과 2지4천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진되고 성곽과 공북루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부터 옛 모습대로 복원해 오고 있다.
산성은 성과 연결이 잘 되는 곳에 축성하게 되는데, 고창읍성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입암산성이 있으며, 입암산성은 나주진관과 더불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호남내륙에서 한양으로 갈 때는 노령산맥인 갈재를 넘어야 했는데 갈재는 험준하고 봉변을 주는 곳이었다. 이러한 곳을 지키고 영광, 고창, 장성 등 부근 지역의 농산물과 해산물을 법성포를 통해 반출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입암산성이 담당했었다. 서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도 입암산성에서 막아야 하는데, 입암산성과 법성포와 고창, 영광지역은 너무 멀어 입암산성의 힘이 크게 미치지못해 서해안 일대를 지키는 전초기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고창읍성은 이러한 이유로 축성되었고 호남내륙을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지켜왔다.
축성에 사용된 석재는 거의 자연석이지만 초석, 대리석, 당간지주 등 어느 절에서 나온 듯한 석재들을 깨뜨려 쓴 것도 가끔 끼여 있다. 특히 북문인 공북루의 주춧돌 높이는 제각각이라서 1m쯤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예 땅에 깔려 기둥이 바닥까지 내려온 것도 있어 이채롭다.
조선시대의 읍성은 평야지대에 양면을 돌로 쌓아 만들고 성문 위에는 누각을 지어 적을 감시하고 전투를 지휘했으며 성내에서는 관민이 함께 생활하였다. 그런데 고창읍성만은 나지막한 야산을 이용하여 바깥쪽만 성을 쌓는 내탁법 축성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둘러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축성하였다. 또한, 성내에는 관아만 만들고 주민들은 성밖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 성 안으로 들어와서 함께 싸우며 살 수 있도록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성벽에는 축성에 참여했던 고을 이름과 축성연대가 새겨져 있어 계유년(1453)에 전라 좌, 우 도민들이 모두 참여하여 축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주초와 문짝을 달던 홈이 파인 누문(樓門)을 가지고 있어, 평양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성문,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강화읍성 등에서 볼 수 있는 양식과 비교되어 성곽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여성들의 성벽 밟기 풍습으로 유명한데, 한 해의 재앙과 질병을 쫓고 복을 비는 의식의 하나로 좋은 민속자료가 된다.
성을 밟으면 병이 없어 오래 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성 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엿새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날에 답성 대열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고창읍성이 아낙네들의 힘만으로 축조되었다는 전설적 사연으로 답성도 부녀자들만의 전유민속이 되었지만 흙 한줌, 돌 한 개도 모두가 부녀자들의 손과 머리로 운반, 구축되었던 당시의 대역사를 되새겨 보는 뜻으로 돌을 머리에 이고 도는 풍습이 남아있다. 또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관습은 여인네들의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깊은 뜻은 이 성곽의 축성 배경이 왜침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유사시의 석전에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예지로서 머리에 인 돌을 성안에 쌓아 두고 갔다는 전설도 모두가 호국의 예지를 빛내주는 이야기들이다.
고창군에서는 답성민속을 기리기 위해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을 군민의 날로 정하고 「모양성제」와 함께 답성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읽을거리
《읍성(邑城)》
지방행정관서가 있는 마을에 관부와 민가를 둘러쌓은 성으로 행정적인 기증과 군사적인 기능을 함께 갖는다. 한국에서 언제 읍성이 처음 나타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고려시대에는 주요 지방도시에 읍성이 거의 축조되었으며, 조선시대에 크게 유행하여 초기에만 179개가 있었다. 읍성은 남해안?서해안지방과 변방에 주로 축조되었는데, 고을의 크기나 중요성에 따라 그 규모가 달랐다. 고려말기에 축조된 읍성은 대부분이 토성이었으나 조선초기에는 석성으로 바뀌고 그 규모가 확장되었다. 특히 세종 때부터는 경상도 ?전라도?충청도의 바다가 가까운 지역에 읍성들이 새로 축조되거나 개축되었다. 이때에는 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벽을 높이면서 옹성(甕城)과 치성(雉城)?해자(垓字)를 시설하도록 중앙정부에서 감독을 했다. 한편, 지방의 수령들에게는 근무지침으로 성을 보수하는 항목도 있었고, 읍성을 쌓은 지 5년 이내에 무너지면 문책을 하기도 하였으며, 단단히 쌓으면 상을 주는 규정도 있었다. 읍성은 조선말기까지 있었으나, 1910년 일본에 의하여 읍성철거령이 내려져 많이 사라졌다. 지금 내려오는 읍성으로 수원(水原)?동래(東萊)?해미(海美)?비인(庇仁)?남포(藍浦)?언양(彦陽)?보령(保寧)?남원(南原)?고창(高敞)?흥덕(興德)?낙안(樂安)?진도(珍島)?경주(慶州)?진주(晉州)?거제(巨濟) 읍성 등이 있다.
읍성은 평지에만 쌓는 일이 드물고 대개 배후에 산등성이를 포용하여 평지와 산기슭을 함께 감싸면서 돌아가도록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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