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백파율사비 | |||||
작성자 | 김** | 작성일 | 2014-02-03 | 조회수 | 1121 |
---|---|---|---|---|---|
▣선운사 백파율사비(禪雲寺白坡律師碑)
지정번호 :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 122호
소 재 지 :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500
시 대 : 조선시대
선운사의 오른쪽 숲속 부도밭 안에 서 있는 비로, 백파율사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백파는 조선 후기의 승려 긍선(亘璇:1767~1852)의 법호로, 조선시대의 불교억제정책 속에서도 불교의 오랜 정체기를 헤치며 조선 후기의 불교를 다시 꽃피운 화엄종의 종주이다.
비는 네모난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씌운 모습이다. 비문은 백파율사의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 철종 9년(1858)에 세운 비로, 추사 김정희 선생이 비문을 짓고, 비의 명칭을 썼다. 추사의 글씨체와 백파율사의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읽을거리
《백파율사비(白坡律師碑)》
백파율사비 앞면
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
백파율사비 뒷면
我東近無律師 一宗, 惟白坡 可以當之, 故以律師書之. 大機大用, 是白坡八十年籍手着力處. 或有以機用殺活, 支離穿鑿, 是大不然. 凡對治凡夫者, 無處非殺活機用, 雖大藏八萬, 無一法出於殺活機用之外者. 特人不知此義, 妄以殺活機用, 爲白坡拘執着相者, 是皆???樹也. 是爲足以知白坡也. 昔與白坡, 頗有往復辨難者, 郎與世人所妄議者大異. 此個處, 惟坡與吾知之. 雖萬船苦口設人, 皆不解悟者, 安得再起師來, 相對一笑也. 今作白坡碑面字, 若不大書特書於大機大用一句, 不足爲白坡碑也. 書示雪竇白巖諸門徒, 果老 記付, 貧無卓錐, 氣壓須彌. 事親如事佛, 家風最眞實. 厥名兮?璇, 不可說轉轉.
阮堂學士 金正喜 撰弁書. 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 日立.
해석)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율사(律師)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고로 여기에 율사라고 적은 것이다. 대기대용(大機大用), 이것은 백파가 80평생 가장 힘들인 곳인데, 혹자는 기용(機用)과 살활(殺活)을 지리하고 억지스럽다고 하지만 이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무릇 보통사람들을 대치함에 어느 것이나 살활과 기용 아닌 것이 없으니, 비록 8만대장경이라고는 하나 어느 것 하나 살활과 기용에서 벗어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뜻을 모르고 허망되게 살활과 기용을 갖고 백파가 고집했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하루살이가 느티나무를 흔드려는 격인 것이다. 이래서야 어찌 백파를 안다고 하수 있겠는가? 옛날에 내가 백파와 더불어 여러 번 왕복서한으로 변증한 것은 세상사람들이 헛되이 의논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다. 비록 만 가지 방법으로 입이 쓰도록 사람을 설득하려 해도 모두 깨닫지 못하니 어찌하여 백파를 다시 일으켜 서로 마주보고 한번 웃어볼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백파의 비문을 지으면서 만약 대기대용 이 한 구절을 크고 뚜렷하게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백파비로서는 부족하다 할 것이다. 설두, 백암 등 문도들에게 이것을 써주면서 과로(果老: 추사의 별호, 즉 과천에 사는 노인)는 다음과 같이 부기하노라.
가난하기는 송곳 꽂을 자리도 없었으나
기상은 수미산을 덮을 만하도다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였으니
그 가풍은 정말로 진실하도다
속세의 이름은 긍선이나
그 나머지야 말해 무엇하리오.
완당학사 김정희가 찬하고 또 쓰다.
|
- 첨부파일
- 선운사 백파율사비.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