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관아터 | |||||
작성자 | 김** | 작성일 | 2014-02-03 | 조회수 | 10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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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관아터
소 재 지 : 전북 정읍군 고부면 고부리
옛날 고부는 전주부 다음 가는 군(郡)이었다. 전주부윤이 종2품이고 현령, 현감이 종5,6품인데 고부군수만은 종4품이었기 때문이다. 수탈의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당시 서울에서는 '자식을 낳아서 호남에 가서 벼슬하게 하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노래하는 동요까지 나왔다고 한다.
당시 이곳 고부군수로 있었던 조병갑은 규정보다 3배가 많은 토지세를 징수했을 뿐만 아니라 부호들을 불효(不孝), 불목(不睦), 음행(淫行)이라는 무고한 죄로 2천냥을 수탈했으며, 태인 현감을 지낸 자기 부친의 송덕비를 건립한다 하여 1천냥을 강제징수 하는 등 갖은 탐학을 자행하였다. 이런 조병갑의 탐학에 대한 고부 사람들의 분노는 1894년 1월 10일 봉기로 터져 나왔다. 전봉준은 태인 접주 최경선(崔景善)과 고부의 송두호(宋斗浩), 김도삼(金道三)을 비롯한 1,000명의 교도와 농민들을 모아 창동에서 운학, 후지를 거쳐 고부로 이동했고 다른 하나는 장문리를 넘어가는 천치재로 향하여 고부로 진격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고부 관아가 접수되고 조병갑은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달아났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들은 옥문을 열어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창고를 헐어 양곡을 나눠주었으며 무기를 나눠 가졌다.
당시의 관아 건물은 없어졌고 지금 그 자리에는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현재의 초등학교 그 어디쯤이었을 고부관아는 주춧돌과 기와조각 하나 발견되지 않는 가운데 향교 내에 있는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은행나무만이 지나간 역사를 말없이 간직한 채 오늘도 서 있다. 초등학교 옆에는 고부향교가 위치하고 있는데 장봉선의 『전봉준 실기』에는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이 한 때 이 향교의 장의(掌議)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한 때 주목을 받기도 했으나, 현재는 이런 주장이 수용되고 있지 않다.
현재 행정구역상 정읍군 고부면 고부리로 편재되어 있는 이곳은 동학농민전쟁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부 농민 봉기를 알리는 안내판 하나 설치되어 있는 실정이다.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이곳이 조병갑이 오가던 곳이고, 죄 없는 사람들이 잡혀와 시달리던 곳이며, 농민들이 물세감면을 진정하기 위해 긴장된 걸음으로 들어서던 곳이며, 또 그날 횃불을 든 농민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던 곳이려니 되새겨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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