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본문바로가기
ender
커뮤니티
자료실

자료실

전봉준선생 고택지
작성자 김** 작성일 2014-02-03 조회수 937
?전봉준선생 고택지(全琫準先生故宅址) 지정번호 : 사적 제 293호 소 재 지 :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458-1 시 대 : 조선시대 후기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안내판에는 생가라고 씌어 있으나 전봉준은 1855년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당촌마을의 전봉준 생가 터는 지금 밭이 되어 있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전봉준은 조선 고종 27년(1890)인 30세 때 동학에 몸을 담아, 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로 임명되었다. 그는 관리들의 횡포에 맞서 농민과 동학교도들을 조직해 동학 운동을 주도하였다. ‘공맹의 학’을 닦던 전봉준은 유학의 가르침만으로는 세상을 구제하는 데 이미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있던 중에 ‘보국안민’이라는 동학당의 주의에 감동하고 ‘마음을 바로한 자의 일치는 간악한 관리를 없애고 보국안민의 업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1890년 무렵 동학에 입도(入道)했다고 한다. 이 옛집은 조선 고종 15년(1878)에 세워졌다. 앞면 4칸?옆면 1칸의 초가집으로 안채가 구성된 남향집이다. 동쪽부터 부엌?큰방?윗방?끝방 순서의 일(一)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남부지역 민가 구조와는 다른 방향으로 되어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부엌은 앞뒤로 두 짝의 널문을 달았고, 큰방과 윗방은 장지문을 통하며 연등천장[椽背天障]이다. 끝방은 곳간으로 사용되었으며, 끝방 앞쪽은 담을 둘러 땔감을 두었다. 두 방 앞은 툇마루를 놓았고, 대문 동쪽에 화장실이 있다. 집 둘레의 돌담은 돌 사이에 회를 넣어 굳히고 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었다. 전봉준의 공초록(供招錄)에는 이곳에 와서 수년이 되었다고 했는데 촌로(村老)들의 말에 의하면 처음 이웃 마을 양교리(陽橋里)에서 옮겨온 것이라 한다. 갑오년(甲午年 1894) 1월에 봉기한 후 안핵사 이용태(李容泰)가 내려와 동학교인이라고 지목되는 사람의 집을 모두 불질러 버렸는데 이때 전봉준의 집도 불타버렸다고 한다. 그 동안에 이론(異論)이 있었으나 1974년에 보수(補修)를 하면서 해체(解體)작업을 하는 중에 밝혀진 상량문(上樑文)에 “무인(戊寅) 2월 26일(高宗 15年 1878)” 세운 것으로 되어있으니 어쩌면 전부 타지는 않고 남아 있는 폐옥(廢屋)을 보수하여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읽을거리 ≪전봉준(全琫準)≫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의 지도자. 초명 명숙(明叔), 별명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30여 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임명되고 은거 중인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여 국정개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탐학(貪虐)을 자행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700섬의 수세(水稅)를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是正)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官衙)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강탈당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케 했으나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 이윽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슬로건을 내세우고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궐기를 호소하였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溝)?정읍(井邑)?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봉기, 8,000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진멸권귀(盡滅權貴)?축멸왜이(逐滅倭夷)를 내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 전주를 향해 진격 중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계속 정읍?고창?무장 등을 장악,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淸軍)이 인천에 상륙하고 동시에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군(日軍)도 입국하여 국가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선무(宣撫)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탐관오리의 응징, 노비의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 등 12개 조목의 시정개혁(施政改革)에 대한 확약을 받고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도정(道政)에 참여, 감시하였으나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일본이 청일전쟁에서의 우세를 이용하여 침략행위를 노골화하자 이에 격분, 재봉기하였다. 전봉준은 남도접주(南道接主)로 12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의 10만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 하에 항일구국(抗日救國)의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다. 한때는 중부?남부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규모가 확대되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였으며 공주(公州)에서 일본군과의 대격전 끝에 대패(大敗)하고 10월 금구싸움을 끝으로 종식되었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 피신, 동지 손화중(孫化仲)?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거(再擧)를 모의하던 중 지방민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동지들과 함께 1895년 3월 처형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