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 미륵전(金山寺 彌勒殿) | |||||
작성자 | 임** | 작성일 | 2017-07-13 | 조회수 | 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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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실된 후 수문대사가 다시 중건한 건물이다. 1635년(인종 13) 미륵전을 포함하여 경내 주요 건물을 중건하고 낙성법회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왜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착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여러 건물을 중건하였던 것으로 보아 왜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사에 착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여러 건물을 중건하였던 것이다. 금산사 중건이 끝난 후 1748년(영조 24)에 금파대사(金波大師)에 의해 중수되었고, 1897년(대한제국 광무1)에 용명대사(龍溟大師)에 중수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는 금호대사(金湖大師)가, 1938년에는 성열대사(成烈大師)가 각각 중수를 하였다. 금산사에서 두드러지는 미륵전은 미륵에 대한 신앙이 매우 컸음을 보여준다. 미륵신앙이란 지난날 석가모니불이 그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미륵에게 장차 성불하여 제1인자가 될 것이라고 수기(授記)한 것을 근거로 삼고, 이를 부연하여 편찬한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을 토대로 하여 발생한 신앙이다. 이 삼부경은 각각 상생(上生)과 하생(下生)과 성불(成佛)에 관한 세 가지 사실을 다루고 있다. 미륵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덕을 닦고 노력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서 미륵보살을 만날 뿐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좇아 염부제(閻浮提:사바세계)로 내려와 제일 먼저 미륵불의 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미륵신앙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오랫동안 민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 구조 1·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多包)집이다. 겉모양이 3층으로 된 한국의 유일한 법당으로 내부는 통층(通層)이다. 기단(基壇)은 양쪽에 자연석을 초석으로 앉힌 돌계단이 있다. 두리기둥은 우주(隅柱:모서리 기둥)가 매우 굵고 기둥머리에 창방(昌枋)을 끼고 그 위에 평방(平枋)을 올렸으며, 머리끝 부분과 기둥 사이에 공간포(空間包)를 놓았다. 가구(架構) 방식은 1층은 고주(高柱) 4개와 20개의 기둥을 주위에 세워 고주와 이 기둥들을 커다란 퇴보로 연결하였다. 2층은 이 퇴보 위에 가장자리 기둥을 세워 그 안쪽 고주를 퇴보로 연결하였다. 3층은 몇 토막의 나무를 이어서 만든 고주를 그대로 우주를 삼아 그 위에 팔작지붕을 올렸다. 이 특수한 가구 방식은 목조 탑파(塔婆)의 구조에서 볼 수 있는데, 심주(心柱) 각층 기둥이 연결되는 방식을 본떠서 한 개의 심주 대신에 네 개의 고주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공포는 내외 2출목(二出目)으로 외부 첨차(?遮)는 우설(牛舌), 내부 첨차는 운궁(雲宮)으로 되었다. 1층과 2층의 퇴보는 그 끝이 길쭉하게 뻗어 나와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고, 그 아래에 운공(雲空)이 있다. 규모가 웅대하고 상부의 줄어든 비율이 크기 때문에 안정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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