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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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백산성(扶安 白山城)
작성자 임** 작성일 2017-07-13 조회수 362

개요

고부(古阜)와 부안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있는 백산(白山)에 축조되었다. 660(의자왕 20)663(부여풍 4)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가 함락되어 백제가 멸망한 뒤, 신라 문무왕(文武王, 661681) 3년에 백제 유민들이 일본에 있던 의자왕(義慈王, ? ~660,641~660)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을 맞아 왕으로 삼고 백제의 부흥을 시도했다. 일본의 니혼쇼키(日本書紀)천지기에 보면, 부여풍이 백촌(白村)에 가서 일본의 구원군(救援軍)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백촌이 바로 백산이다. 1894(고종 31)에는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이 이곳으로 본진(本陣)을 옮겨 사용하였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그들이 서면 산이 농민의 흰옷으로 덮이고 앉으면 손에 쥔 죽창이 가득하다고 해서 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구조

백산성(白山城)은 백산 정상을 둘러쌓아 만든 성으로 바깥 성을 포함한 4개의 단이 있으며, 토단 바깥으로는 말뚝을 박아 울타리를 둘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부 훼손된 곳이 있으나 건물터, 옛 우물터, 삼국시대 토기조각들과 높이 3~4m 정도의 토단이 잘 남아있다.

 

백산봉기

전봉준은 고부봉기 후 백산에 주둔하여 추이(推移)를 보다가 광주 출신으로 민정을 잘 아는 용안현감 박원명(朴源明)이 후임군수로 부임하여 백성들을 효유하고 해산을 권유하자 일단 병을 파하고 흩어졌다. 그러나 안핵사로 부임한 이용태(李容泰)가 동학농민을 탄압하고 수탈하자 전봉준 · 김개남 · 최경선은 무장으로 달려가 손화중과 함께 기병준비를 끝내고 4천여 명의 농민군을 모아 창의문을 발표하고 전라도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대의를 위해 일어날 것을 호소했다. 전봉준 · 손화중 · 김개남이 인솔한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은 무장을 출발하여 도중에 호응하는 고부의 농민들과 합세하여 그날 밤 고부성을 습격하였다. 그런데 안핵사 이용태는 도주하였고, 좌수와 이속들만 남아서 이들을 맞이한 셈이다. 전봉준은 군기고(軍器庫)를 접수하여 무기를 소지하고 억울한 죄수들을 풀어주고, 하루 밤을 지낸 후, 322일에 백산으로 옮겼다.

이때 쯤 무장봉기와 고부점령의 소식을 듣고 전라도 각지에서 구름처럼 동학농민군이 각 고을의 두령(頭領)들을 따라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이곳 백산은 해발 48m도 못되는 구릉에 지나지 않지만 주변이 모두 평야지대여서 우뚝 솟은 곳이라 이곳에서 여러 고을의 관아들을 위협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동학농민혁명군은 백산대회를 가짐으로서 본격적인 혁명군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대회를 통해 앞으로의 투쟁이 혁명임을 만천하에 공포하고 지휘체계를 갖추는 등 군율을 정비했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는 각 지역의 농민군들이 합류하여 황토현전투(黃土峴戰鬪)와 황룡촌 전투(黃龍村戰鬪)를 승리하고 전주성(全州城)에 입성했다. 백산대회는 이러한 농민군의 승리가 정당하다는 신호탄이었으며 나아가 동학농민혁명이 조선의 전근대적 지배체제를 개혁하고 외세의 침탈을 물리치고 자주적 근대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동학의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단초적 역할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