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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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무성서원(井邑 武城書院)
작성자 임** 작성일 2017-07-13 조회수 340

 

개요 

무성서원은 최치원(崔致遠)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최지원(崔致遠)886(정강왕 1)에 태산(泰山)태수로 재임 중 치적이 뛰어나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는데 합천 태수로 전임하면서 월연대(月延臺)에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태산사(泰山祠)라 부른데서 이 서원이 비롯되었다. 본래 명칭은 태산서원이었으나 1696(숙종 22)에 사액(賜額)을 받아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서원 내에는 1486(성종 17) 이후부터 강안(講案), 봉심안(奉審案), 심원록(尋院錄), 원규(院規)와 같은 서적들이 보관되어 전해오고 있다. 이후 서원은 1825(순조 25) 명륜당(泰山祠)이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1828(순조 28)에 다시 중건하였고, 1844(헌종 10)에 서원 전체를 새로 세웠다. 1868(고종 5)에는 흥선대원군이 대대적인 서원 철폐를 단행해 전국의 47개소 서원을 제회하고 모두 철폐하였을 때에도 화를 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훼손되지 않고 무성서원은 조선시대를 거치며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서원으로 걸출한 선비들을 배출한 중심지이기도 했다. 특히 정극인은 이곳에 들어와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기반으로 하여 고현향악을 만들고 학당을 세워 제자들을 교육하였으며, 이곳의 춘경(春景)을 완상(玩賞)하면서 안빈낙도하는 풍류생활을 노래한 상춘곡(賞春曲)을 지었는데 이 작품은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구한말에는 최익현(崔益鉉)이 을사늑약(乙巳條約)으로 국권이 강탈당하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돈헌(遯軒) 임병찬(林炳瓚)과 손을 잡고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정도로 항일 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였다. 최익현(崔益鉉)은 의병을 일으켜 순창부근까지 진격하였지만 안타깝게도 관군에 패하여 임병찬(林炳瓚)과 함께 붙잡혔고 대마도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다가 1907(고종 44) 11일 옥중에서 순국하고 만다. 현대에 이르러서 1992년에 정읍군수 김성연이 최익현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를 세웠다.

 

구조

 이 서원은 조산(祖山)인 성황산과 안산(案山)인 시산을 가지고 있고 성황산은 좌청룡과 우백호를 형성하고 있으며 혈()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서원 앞쪽에는 자라내가 흐르고 있는데 대부분의 서원이 우리나라 전통 풍수지리의 원리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세를 이루고 있는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무성서원 또한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아 지금의 자리로 위치한 듯하다.

건물 구조는 크게 내부와 외부로 나뉘게 된다. 먼저 내부는 배향 공간인 태산사(泰山祠)가 맨 위에 있고 중간에 강학공간인 명륜당(泰山祠), 그 다음으로 현가루(絃歌樓)가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서원 외부 좌측담장에는 유생들이 기거하고 독서를 하는 공간으로 사용하였던 동·서재(東西齋)인 강수재(講修齋)와 흥학재(興學齋) 중심으로 하였는데 현재 서재(西齋)에 속하는 흥학재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 이외에 서원을 관리하는 수호인의 살림집인 고직사(高直舍), 제사 때 제수를 마련하던 곳인 전사고(典祀庫), 그리고 비석군(碑石群) 등이 배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