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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선생 고택지(全琫準 先生 故宅址)
작성자 임** 작성일 2017-07-13 조회수 602

개요

동학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전봉준이 살았던 고택이다. 이곳은 전봉준 장군이 고부농민봉기가 있기 5~6년 전에 이사를 와서 마을 아이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는 훈장으로 조용하게 살아가다가 농민봉기를 일으킬 때까지 거주하였던 집이다. 이 고택은 고부농민봉기 때 안핵사(按?使) 이용태(李容泰)에 의해 불타 없어졌으나 지난 1974년 보수 당시 무인 226일이라는 간지가 쓰인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어 1878년을 건축연대로 보고 있다. 따라서 출생 연대와 무려 23년간의 시간적 차이가 있어 이곳을 출생지로 보지 않고 한때 거주지로 보는 것이다.

 

구조

이 고택은 높이 15cm의 잡석의 출대 위에 세워진 것이며, 집의 구조는 남향으로 동쪽부터 부엌, 큰방, 윗방, 끝방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부엌이 서쪽에 위치하여 큰방과 윗방이 배치되는 것인데 이 집은 순서를 무시하고 있다. 부엌은 앞뒤로 두 짝의 널문을 달았고, 큰방과 윗방은 장지문을 통하여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이다. 고택의 끝방은 곳간으로 사용되었으며, 끝방 앞쪽으로 담을 둘러 땔감을 두었다. 두 방 앞은 툇마루를 놓았는데 대문 동쪽에 화장실이 있다. 집둘레의 돌담은 돌 사이에 회를 넣어 굳히고 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었다. 건물의 내부배치에 있어서는 순서가 조금 바뀌어 있으나 건축적인 기법이나 재료에 있어서는 기존의 그것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전봉준의 일생과 동학운동

전봉준의 출생과 유동생활

전봉준은 1855년에 지금의 전북 정읍군 이평면 장내리에서 태어났으나, 출신성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가 8,9세쯤 되었을 때 삼남(三南)일대는 민란(民亂)으로 뒤집혔던 시기였으며 내정의 부패와 외세의 침입이 극도로 달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의 세력다툼으로 정변이 자주 일어나고 탐관오리에 의해서 농민들은 곤궁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가 태어날 당시 농촌에는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해 사촌 및 팔촌 등 그의 여러 집안이 함께 모여 살았다. 증언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 전창혁이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하며, 아마 전봉준도 동네 여러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서당에서 아버지로부터 천자문 등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아버지를 따라 고면 신중리 주산마을 부근으로 이사하였다. 다시 그의 집안은 큰집 6촌 형 태호가 살고 있는 태인현 감산면 황새마을로 이사하였으며, 그의 나이 18세 무렵 다시 황새마을을 떠나 심산궁곡인 태인현 산내면 소금동 부근으로 이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봉준은 여산 송씨와 혼인을 하여 2명의 딸을 낳았고, 의기가 통하는 친구들과 전주 구미리, 태인 동구천 등으로 유동생활을 하기도 했고, 할머니와 처가 세상을 떠나(1876) 이곳에 안장하였다. 이후 그는 식솔들을 거느리고 고부 양교리를 거쳐 1886년 무렵 조소리로 이거하여 살았는데, 이곳에서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고, 이와 인접한 말목장터에 점포를 얻어 병을 고치고 전도(동학)를 하면서 민중들과 접촉을 하였다. 그런데 갑오년 직전에 그의 아버지가 조병갑의 학정에 항거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이 무렵 그는 봉기를 계획했으나 가솔의 안전을 위해 심산궁곡인 태인 산외면 동곡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가 31세에는 정읍 이평면 장내리로 이사했으나 바로 이평 조소리로 옮겨 살았다. 이와 같이 전봉준은 유동생활을 하며 성장하였으며 그 과정 속에서 봉건통치 계급의 가혹한 착취와 외세 자본주의 침략아래 신음하는 민중들을 목도했을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전봉준은 나라 사정과 민중의 삶이 더욱 더 피폐해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항상 만족하지 못하여 사방을 떠돌아다녔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거처를 옮겨 다닌 이유에 대해서는 근거자료가 부족하여 명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가난했던 가정형편과 무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동학농민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다. 동학은 신분제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 가난했던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은 간단하게 말해서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이라고 볼 수 있다.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게 된 시대적 배경으로는 개항 이후 계속되는 농민들의 항쟁, 그리고 민중세계의 불만이 있었다. 그리고 사회경제적 위기의 고조와 지방관과 양반의 수탈이 있었으며, 조세와 재정 제도의 파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봉건사회가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해 가던 시기에 개화파의 영향을 받아 선진사상을 갖게 된 전봉준은 조선 후기 발생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로서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고 시정개혁을 도모하게 된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아버지가 조병갑에게 처참히 죽임을 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동학농민운동은 고부군수 조병갑이란 수령에게 불만을 품은 농민들과 함께 시작된다.

전봉준은 각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했다. 원래는 관과 민이 협력해서 개혁 작업을 진행한다는 취지였지만, 실제 고을의 벼슬아치들이 거의 도망가고 없는 상태에서 집강소는 농민의 손에 의해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다. 이것은 비록 호남 지방과 일부 인근 지방에 한정되기는 했지만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농민자치였다. 그런데 조선에 상륙한 일본이 경복궁을 침범하여 친일개화파 정부를 출범시키고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에 조선 내정을 직접 간섭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고 조선의 제도를 자신들이 편한 데로 고쳐나가고 있었다. 전봉준이 이에 반하여 또다시 4천여 명의 농민들을 모았다. 이들은 스스로를 의병이라 칭했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은 이들이 넘기에 높은 장벽이었다.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하고, 나머지 농민군도 진압되었다. 농민군의 기세가 꺾이자 관군과 일본군은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전봉준은 일단 농민군을 해산시킨 뒤에도 재기의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호남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던 김개남을 찾아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옛 부하 김경천을 만나 하룻밤을 머물렀는데 현상금에 현혹된 김경천과 그의 이웃들이 밀고를 하여 전봉준은 잡혀가게 되었다. 전봉준은 다섯 차례의 심문 끝에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들의 혁명 운동이 당시의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조직적인 활동이었음을 증명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당시 백성들의 마음은 전봉준을 아련한 파랑새에 비유하는 녹두가에 담겨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