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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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정동성당 (全州 殿洞聖堂)
작성자 임** 작성일 2017-07-13 조회수 660

개요

로마 가톨릭 교회 소속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의 보두네(Beaudounet, 尹沙物) 신부는 1889(고종 26) 가톨릭 담임신부로 전주에 부임하지만, 전주에는 교도(敎徒)가 한 사람도 없었고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 소양의 대성동에서 3년간 거주하면서 전교를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문교(文敎)하게 되었다. 그 후 비교적 순탄하게 천주교가 포교 및 전파되었지만,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서울로 피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동학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가 전주가 잠잠해지자 보두네 신부는 다음해인 18952월에 다시 전주에 와서 교회의 재건에 힘썼고, 당시의 전라감사 이도재(李道宰)를 찾아간 그는 교회건축에 관한 여러 가지 일들을 상의하고 협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감사 이도재는 그를 비교적 친절하게 대해 주었으며, 많은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점차 보두네 신부의 위치가 확고하게 되었고 천주교의 튼튼한 기반 구축을 위해 그는 전라도 교구(敎區)를 책임질만한 대성당을 전주에 건립할 것을 결심하고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첫 단계 사업으로 터의 결정과 매입이 중요한 과제였다. 신도들은 전주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오목대가 적지라고 하였다. 그러던 중 서울에 있는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전주에 내려왔는데 뮈텔 주교는 오목대에 올라가 전주 지역을 살펴보고 성당자리는 지금의 전동이 적지라고 조언하였다. 그리하여 현재의 전동에 성당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당초 전주의 많은 백성들은 전주 지역을 한눈에 바라보는 자리에 성당을 짓는다는 사실에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런 오해가 차츰 풀려 윤지충, 권상연을 비롯하여 유향검, 유관검, 윤지현, 이우집, 김유산이 처형된 이곳이야 말로 더없는 전주성당지라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서울 명동성당의 내부공사를 마무리 했던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의 설계로 성당의 건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당의 준공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아 상당한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다. 공사감독을 맡았던 임모라는 사람이 공사비를 떼어먹고 달아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보두네 신부로부터 공사비를 꾸어 금광업에 투자하였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돈을 되돌려 받지 못하였다. 또 폭풍우가 심하게 몰아닥쳐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등 성당 준공은 순탄치 않았다. 수많은 공사의 어려움 속에서도 전주 교인들의 헌금과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 가운데 독지가(篤志家)인 김창열이 거액의 돈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어렵게 완공된 전동성당은 이후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모태가 되어 전라북도에 탄생하니 그 명성에 걸맞게 그 후로 더욱 교세를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전주 전동성당은 사적 제288호로 풍남문(豊南門) 밖에 위치하고 있다. 부지를 매입하고 190855일 성당 건립에 착수해 1914년에 준공했다. 그 후 23년간 진행된 성당 건립은 1931년 최종 완공되었고, 전동성당은 서울의 명동성당을 빼고는 전국에서는 제일 큰 규모의 훌륭하고 우아한 성당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구조

전동성당은 호남 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며, 중앙의 종탑과 양쪽 계단에는 비잔틴 양식의 뾰족 돔을 올렸으며, 성당 내부의 석조 기둥에도 비잔틴 양식이 녹아 있다. 순교자를 채색화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으며, ·서양의 곡선미가 융합되어있다. 특히 12개의 창이 있는 종탑부와 8각형 창을 낸 좌우 계단과 돔은 성당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웅장하며 화려한 교회로 손꼽히고 있다.

성당은 화강암을 주춧돌로 하여 중국인 인부 100명이 직접 구운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주춧돌인 화강암은 착공 당시인 19097월에 대한제국을 간접 통치하고 있던 일본 제국 통감부가 헐은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 돌을 이용하였다. 성당을 구성하는 벽돌의 일부도 헐린 성벽에서 나온 흙을 구워 만들었다. 나머지 석재와 목재들은 각각 익산시 황등면의 채석장과 승암산의 목재를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