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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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慶基殿)
작성자 임** 작성일 2017-07-13 조회수 252

개요

경기전(慶基殿)은 조선이 건국되자 왕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서 태조의 어용(御用)을 봉안하였으며, 1414(태종 14)에 건립되었다. 보물 제931호인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모신 본전과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공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肇慶廟), 조선의 여러 실록을 보관했던 전주사고(全州史庫), 예종의 탯줄을 묻은 태실(太室)등의 유적이 있다. 전주, 경주, 평양 등은 창건 당시에는 어용전이라 불렀는데, 1412(태종 12)에는 태조진전이라 하였다가, 1442(세종 24)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승전이라고 하였다. 경기전은 1597(선조 30)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4(광해군 6) 11월에 중건되었다. 경기전은 한옥마을 중심거리인 태조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339(1963121)로 보존되고 있는 사적지이다. 경기전은 조선이 건국되자 왕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 태조의 어용을 봉안하였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그 선대들이 살았던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생각에 건국직후 태조의 어진을 모시고 그 건물을 새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뜻으로 경기전이라 하였다. 전주에 이성계의 영정이 봉안된 것은 1410(태종 10)의 일인데 영정을 모신 태조 어용전은 임진왜란 때에 전부 소실되었다가 앞서 말했듯이 1614(광해군 6) 11월에 중건되었다.

연혁

창건연대는 1410(태종 10)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이르기를 경기전은 영락 1410(태종 10) 부성(완산부, 즉 전주를 말함) 남문 내에 봉안했다.”라는 기록 또한 경기전 창건연도를 확인해 주고 있다.

태조의 영정은 전주. 경주. 평양. 영흥 4곳에 봉안되었는데, 처음에는 어용전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다가 1412(태종 12) 태조진전으로 변경되었다. 그 후 1442(세종 24) 6월 전주 경기전, 경주 집경전, 평양 영승전, 영흥 선원전이라 일컫게 하고 각각 전직 두 사람을 두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그동안 부르던 태조진전을 경기전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현재의 경기전은 정유재란(1597) 소실 된 것을 1614(광해군 6) 6월에 중건한 것으로, 1675(숙종 4) 11월에는 위봉산성을 쌓아 유사시 대비였으며, 1683(숙종 9)에 다시 새로운 영정으로 교체하였다. 1687(숙종 13) “전라도의 경기전 별전에 재변이 생겼다.”라는 조선왕조실록 기록으로 보아 별전이 일부 훼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경기전이 인위적으로 훼손을 당하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이다. 그 시작은 경기전의 부속채가 있었던 서쪽 부지를 분할하여 일본인 전용 소학교를 세우게 되면서부터였다. 왕권을 상징하던 객사를 철거하여 소학교를 세웠던 개념과 같은 것으로 이로 인하여 절반 이상의 땅이 상실되었고 부속채를 이때 거의 철거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을 정전과 정전 옆의 익랑과 이를 두르고 있는 내삼문과 외삼문, 조경묘, 재실 등이다.

경기전에 처음 봉안한 영정은 경주 집경전본의 진용을 묘사한 것이다. 그 후 1442(세종 24) 7월에 고쳐 그리기 위해 이순몽(李順蒙)을 경주에 김종서(金宗瑞)를 전주에 보내어 태조의 수용(?容)을 봉영(逢迎)하여 오게 하였으며, 동년 9월에 이방간(李芳幹)의 첩의 아들집에 모셔진 태조의 수용을 이종생(李從生)을 보내어 모셔오게 하였다. 1443(세종 25) 10월에는 공조판서 최부(崔府)를 보내어 태조의 수용을 전주의 경기전에 봉안(奉安)하게 하였다. 그 후 정유재란(1597) 때 전각이 소실됨에 따라 태조의 영정은 정읍-아산-강화-묘향산 등지로 전진하며 보존되었다. 현재의 영정은 1872년 서울 영희전의 대조 영정을 모본(母本)으로 새로 그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