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충렬사 (南海 忠烈祠) | |||||
작성자 | 임** | 작성일 | 2017-07-13 | 조회수 | 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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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남해 충렬사는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이순신이 노량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 중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과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노량충렬사’라고도 한다. 처음 이곳에 유해를 안치하였다가 충남 아산의 현충사(顯忠祠)로 이장하였고, 현재 이곳에는 봉분(封墳)뿐인 가분묘만 남아 있다. 이순신이 순국한 지 34년째 되던 1632년(인조 10년)에 이 곳 선비들이 유지(遺址)에 작은 초사(草舍)를 지어 치제추모(致祭追慕)하였다. 1648년에 정인보가 충렬사비를 썼다. 1658년(효종 9)에 초사를 헐고 비로소 사당을 건립하여 봄ㆍ가을로 제향하게 하였으며 비도 다시 세웠다. 1663년(현종 4)에 충무 충렬사와 함께 ‘충렬사’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곳에 있는 4기의 비 가운데에는 이러한 중건사유를 자세히 기록한 비석이 있는데,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썼다. 사당을 세운 당시에는 사당 옆에 호충암(護忠庵)이라는 암자가 있어 화방사(花芳寺)의 승려 10여 명과 승장(僧將) 1명이 교대로 지켰다고 한다. 충렬사는 남해바다를 지키는 수호신의 사당으로 받들여져 왔다. 1871년(고종 8년)에 향사, 서원 철폐령에 따라 사당은 허물어지게 되었으나 1922년에 윤기섭과 고준홍이 자기 집 재산으로 사우3칸을 새로 지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1965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충렬사’와 ‘보천욕일’ 현판을 다시 썼고, 1973년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보수 ·정화되었다. ◆ 구조 경내에는 사당을 비롯하여 비각, 내삼문, 외삼문, 재실, 강당 그리고 일각문, 부속건물, 비(碑) 4기, 가분묘 1기 등이 있고 사당 뒤의 정원에는 이순신의 시신을 임시 묻었던 자리에 가묘소가 남아 있으며, 1948년 정인보가 쓴 충렬사비가 있다. 내삼문으로 들어가면 송시열이 쓴 비와 비각이 있다. 비각의 현판에는 ‘보천욕일(補天浴日)’이라 적혀있는데 이것은'하늘을 수리하고 해를 목욕 시킨다'는 뜻으로 정유재란 때 명나라 어왜도총관 전군도독부 도독의 신분으로 전란에 참가한 명나라 진린(陳璘) 도독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승리를 이끌었지만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운명을 달리하자 이순신의 공을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한 내용에서 나온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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