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본문바로가기
ender
커뮤니티
자료실

자료실

용두사지 철당간(龍頭寺址 鐵幢竿)
작성자 임** 작성일 2017-07-13 조회수 298

개요

용두사지 철당간은 한국 당간과 당간지주 중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청주시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알려져 있다. 소속 사찰은 용두사인데, 세 번째 철통에 새겨져있는 용두사철당기에 의하면 962(광종 13)에 철당간의 주조과 함께 대역사(大役事)가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초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두사의 창건은 철당기의 내용으로 보아 청주지방의 호족세력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고려 초기의 승불 정책에도 영향을 받은 듯하다.

철당기는 김원이 글을 썼으며 손석이 새겼다. 글이 393자로 원래 철통의 수는 30단이었고 높이가 60척이었다고 한다. 또한, 김예종이 염질에 걸리자 철당을 주조하여 부처에게 병을 낫게 해주고 사후에 극락천도를 기원하기 위하여 발원하였음도 알 수 있다. 김예종이 죽고 몇 년이 흘러 옛 서원을 다시 일으킨 다음에 김희일 등이 철당을 주성하여 공사가 완료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1011(현종 2)에는 왕이 이곳에 이르러 연등회를 베풀었으며, 1090(선종 7)에는 범종을 봉안하였는데 모양이 기이하고 그 소리가 몇 십리까지 들렸다고 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보면 1090년에 제작한 금구가 발견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까지 용두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는데 결국 폐사되고 철당간 만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폐사한 년대를 짐작하게 하는 자료가 있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보면 술자들이 이 곳을 세워 행주지세(行舟之勢)를 나타내었다라는 내용이 있어 성종 이전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철당간 중에서 (용두사지, 갑사, 칠장사, 법주사, 담양 읍내리 등) 정확한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것은 용두사지 철당간 뿐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구조

두 지주 사이에 높이가 63cm, 지름 40cm 가량 되는 같은 형태의 철통 20개를 연결하여 높이가 12.7m가되는데, 철통은 상단부로 갈수록 작아진다. 철통의 연결은 상부 철통 하단부에 끼임턱을 만들어 하부 철통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올렸으며, 갑사와 칠장사 철당간과는 달리 이음 부분에 별도의 철띠를 돌리지는 않았지만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용두사지 철당간은 1998~99년 사이에 걸쳐 보존처리가 실시되었는데 조사결과 철통의 내부는 시멘트가 채워져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해방이후에 붕괴를 방지하기 위하여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23년 발간된 청주연혁지에 따르면 당간의 꼭대기에는 보주형의 장식물이 있었는데, 결실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당을 걸기위한 시설물이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남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 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있는데, 내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으나 전후면과 외면 외곽 주위는 너비가 넓은 윤곽대를 돌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두 지주는 건립 시기가 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두 지주의 치석 수법과 규모가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동쪽지주는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세련된 인상을 주며, 지주 굵기도 날씬하고 경쾌하게 치석하였다. 지주 정상부의 호선 처리도 중간에 1단의 굴곡을 깊게 주었고, 날랜 호선을 그리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부석사와 금산사의 당간지주와 유사하다. 그러나 서쪽지주는 지주의 폭과 너비가 넓어져 둔중한 인상을 주고, 정상부도 완만한 호선으로 치석하였으며, 지주 외면 중앙부분은 세로로 둥글게 돌기대를 두었고, 외곽 주위에는 굵은 윤곽대로 장식하였다. 이러한 치석과 장식 수법은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에 건립된 당간지주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동쪽지주가 서쪽지주보다 빠른 시기에 치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용두사지 철당간의 간대석(竿臺石)은 통일신라시대에 일반적으로 쓰였던 간대석 수법 인데, 간대석이 서쪽지주와는 달리 동쪽지주와 동일한 치석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관통된 간공 부위에서 절단된 흔적은 그러한 가능성을 높여준다.

 

일화

고려 초 혜원 스님이 전국에 이름난 사찰 등을 순례하던 중 고을 율양에서 쉬게 되었다. 하지만 한밤중에 먹구름이 몰려와서 비와 천둥번개가 치니 혜원은 합장하고 부처께 빌었다. 그런 뒤에 비가 멎고 서쪽하늘에서 무지개가 서면서 부처님이 나타나 "용두사에 가서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돛대를 세우라고 하였다." 혜원이 날이 밝자 용두사로 갔는데 용두사 주지 스님도 간밤에 같은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스님이 며칠 동안 고심해도 부처님의 뜻을 알 수 없었는데 그 때 어느 한 초립동이 "소금배가 들어올 텐데 돛대가 없구나." 라고 중얼 거리는 소리를 듣고 용두사에 돛대를 상징하는 철당간을 세워졌다고 전해졌으며 청주를 주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 다른 일화로는 청주 에서는 원래 홍수가 많이 나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점술가가 말하기를 큰 돛배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피해를 막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당간을 세어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