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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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문(廻轉門)
작성자 임** 작성일 2017-07-13 조회수 125

 

개요

고려 973(광종 24)에 백암선원으로 창건되었으나 폐사되고,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다 1557(명종 12)경 대규모의 사찰로 중창하며 세운 문이다. 청평사는 6·25전쟁 중에 소실되었으나 회전문만은 남아있었다. 청평사의 회전문은 절에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두 번째 문인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것으로, 중생들에게 윤회전생을 깨닫게 하려는 의미의 문이다.

이 문은 움직이지는 않지만, 회전문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유가 윤회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회전문 안쪽에는 극락전이 세워져 있었다.

 

구조

건축 구조는 정면 3, 측면 1칸이며, 정면의 가운데 1칸은 넓게 드나드는 통로이고 양쪽 2칸에는 마루가 깔려있다. 건물 안쪽은 벽이 둘러진 공간에 사천왕상 등의 입상을 놓을 수 있게 했고, 중앙에는 상인방을 가로로 대고 윗부분에는 화살모양의 나무를 세워 만든 홍살을 설치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간결한 형태로 되어있다. 이는 주심포양식에서 익공계양식으로 변화함을 보여준다.

이는 16세기 중엽 건축 양식 변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공포는 출목없이 주두 위에 두공으로 직접 주심도리를 받치고 있다. , 첨차가 기둥 중심에서 나와 도리를 받친 공포의 부재가 없이 기둥의 맨 윗부분을 공포를 받칠 수 있게 넓적하게 장식하여 지붕을 받치며 차례로 올린다는 것이다. 천장가구는 홑처마에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연등천장이다. 양쪽 2칸은 마루로 되어 있다. 마루는 협소하기 때문에 존상(尊像)을 안치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존왕(尊王)을 봉안하였다면 벽화 또는 탱화로 대신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