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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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동굴
작성자 임** 작성일 2017-07-13 조회수 186

개요

온달장군이 수양하였다는 전설이 남아 있어 온달굴이라 하며, 온달성(溫達城) 밑에 있다고 하여 지산굴(地山窟), 남굴(南窟)이라고도 하고 성산 아래에 있어 일명 성산굴이라고도 한다.

예부터 알려져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되어 있다. 1966년부터 학술조사가 시행되어 1975년 잠시 공개하였으나, 지리적 여건으로 폐쇄하였다가 대대적인 개발을 통해 1997년부터 다시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1400여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형경관이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글자 그대로 지하복마전(地下伏魔殿)을 이루고 있다. 석회암층 담백색 종유석과 석순 등이 잘 발달되어 내부 비경이 웅장하고 동굴의 진입로가 수평을 이루고 있다. 지하 수량이 풍부하여 현재까지도 생성물이 자라고 있으며 노래기, 지내, 곤충, 포유류 등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구조

온달산성이 있는 성산 기슭 지하에서 약 45,000만 년 전부터 생성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동굴은 석회암 지대에 형성된 천연동굴로서 내부는 주로 담회석을 띠고 다채로운 종유석과 석순이 비교적 많으나 입구는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입구의 높이는 8m 내외이고 너비는 8~15m인데 바닥에는 깊이 80cm의 물이 흐른다. 입구에서 동쪽으로 길게 이루어진 주

굴은 6개소의 광장이 있으나 매우 단조롭고 그 길이는 302.5m이며 면적은 349485m²이다. 주굴에서 갈라진 5개의 지굴은 주굴보다 고도가 높다.

동굴의 입구가 남한강변에 있어, 강물 수위가 높아지면 동굴이 물에 잠겨 동굴에 사는 생물은 찾아볼 수 없다. 강물이 동굴 내부를 깎아내려 비교적 단조로운 형태이다. 땅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이 여기저기에 많이 있다.

온달 관련 논란

삼국사기온달전에 의하면, 온달은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출정한 후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전사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계립령은 오늘날 충주 미륵리와 문경 관음리를 잇는 옛 길인 하늘재이며, 죽령은 단양과 풍기를 잇는 오늘날의 죽령으로, 이 일대는 삼국 간에 쟁패가 치열하였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정작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의 위치를 둘러싸고는 의견이 분분하다. 여러 의견 중에서 서울 광장동의 아차산성으로 보는 견해와 경상북도 영월군 영춘면의 온달 산성 일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아차산성이라는 설은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충돌 지역이 한강 하류 일대임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좀 더 지지를 얻고 있는 견해는 아단성=온달 산성이라는 설이다. 이 곳의 고구려 때의 지명이 을아단(乙阿旦)’이었다는 점과, 계립령 및 죽령과 가깝다는 점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 , 이 지역에 온달 관련 전승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온달 산성 자체는 신라 때의 산성이니, 결국 온달은 죽어서 신라 산성에 자신의 이름을 남김으로써 생전에 못다 한 회한을 푼 셈인지도 모른다.

온달전을 보면, 평강공주와 결혼한 온달은 매년 33일에 치러지는 춘계수렵 행사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 평원왕의 눈길을 끌고, 북주(北周)의 침입 때에 큰 공을 세워 마침내 대형(大兄)이라는 벼슬과 함께 정식으로 부마로 인정받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영양왕(?陽王, 590~618) 때에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던 것이다.

당시 고구려가 처하였던 국제 정세를 보면, 이러한 온달의 행적은 충분히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북쪽으로는 북제, 북주, 수 등의 북중국 세력 및 돌궐이 6세기 중반 이후 요해 지역으로의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며 삼국 간 항쟁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이러한 상왕에서 당시 고구려의 대회 정책은, 요동 지역에서는 지금까지의 세력권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남쪽으로는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회복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온달 설화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행적을 한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인물의 이름도 전하는 바와 같이 온달이었을 수도 있다.

 

온달전으로 본 6세기 고구려

온달전에는 평강공주와 온달의 혼인에 대하여 나온다. 공주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왕이 상부의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런데 공주가 어렸을 때 평원왕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한 말을 들어 왕의 말을 어기고 온달에게 시집가겠다고 했다. 그때 왕은 공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가 차지했던 지위를 버리고 결국 온달을 찾아갔다.

고구려는 같은 신분에 속한 사람끼리 혼인을 하는 신분제 사회였다. 그런데 평강공주는 신분이 아래인 온달과 혼인을 한 것이다. 그와 같이 신분이 다른 사람 사이의 혼인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고 실제로 평강공주도 버림받은 상태에서 혼인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평강공주가 열여섯 살의 나이에 혼인한 것은 당시 고구려인들의 적정 혼인 연령이 언제인지를 말해 준다. 물론 신분이 낮은 백성들은 가난하여 혼인을 하지 못하고 평생을 지내기도 했다. 당시 평강공주를 만나기 전 온달과 같은 많은 사람들은 혼인도 못하고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적정연령에 이르면 혼인을 하였을 것이다.

고구려의 왕도는 5부로 나뉘었다. 그중 상부가 있었다. 그 안에 고구려 왕을 배출했던 고씨 세력들도 살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평원왕이 평강공주와 혼인시키려 했던 고씨는 고주몽의 후손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왕은 씨족 안에서 혼인을 하여 정치적 세력을 강화시키려 한 것이다. 바로 그 고씨는 왕들과 그리 멀지 않은 혈족이었을 것이다.

평강공주는 온달에게 갈 때 진귀한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목에 걸고 출궁했다. 공주가 가지고 간 것은 팔찌로 나오지만, 그 외에도 공주와 같은 왕실 세력들이 소유하고 있던 보물들이 많았을 것이다. 공주는 팔찌를 팔아 전택(田宅), 노비(奴婢), 우마(牛馬), 기물(器物)을 사들이니 살림이 완전히 갖추어졌다고 한다. 공주가 사들인 것들이 고구려인의 살림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정은 그 후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누구나 그러한 살림을 갖추기는 어려웠다는 사실이다.

평강공주는 온달에게 말을 사오도록 했다. 그때 조건을 달기를 시인(市人) 즉 민간인들의 말은 사지 말고 병들고 수척하더라도 국마(國馬)를 사도록 한 것이다. 당시 고구려에도 말은 많았던 것이 틀림없다. 소보다 말이 많았을 것이다. 그중 나라에서 기르던 말과 민간인들이 기르던 말들이 구별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국마는 왕실이나 관청 그리고 공적인 활동을 위해 기르던 말로 좋은 말들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은 신분 상승의 기회를 주었다. 온달은 후주 무제가 요동을 쳐들어오자 전쟁에 나가 제일의 공을 세웠다. 그로 인하여 왕이 그를 사위로 인정하게 되었고, 논공에서 대형의 관위를 받았다. 고구려 또한 신분제 사회였던 것은 분명하나, 경우에 따라 온달과 같이 신분상승의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였다. 특히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 대해 논공을 하여 관위를 주고 신분을 상승시키는 것은 전쟁을 늘 벌이던 고구려 왕국의 정치 행위였다.

온달이 대형의 관위를 얻은 것은 전쟁에 참전했기 때문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의 유동성은 기본적으로 차단되었다. 다만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신분적인 지위가 상승하는 경우들이 있다. 온달의 경우도 그 예에 해당할 수 있다. 물론 온달이 신분 상승한 근본적 이유는 평강공주와 혼인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강공주와 혼인을 한 것으로 온달이 대형의 관위를 받은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공을 세웠기 때문인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온달전에는 한북의 땅을 신라가 차지하여 그들의 군현으로 만들었다고 나온다. 그런 까닭에 백성들이 통분해하며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다고 되어있다. 그렇기에 온달은 자신에게 군대를 주면 고구려의 땅을 되찾겠다고 한 것이다. 왕의 허락을 받고 출정한 온달은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고구려 땅으로 회복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은 551년과 553년 신라가 차지한 지역이다. 그것을 영양왕(?陽王, 590~618)이 즉위하자 온달이 되찾겠다고 한 것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신라가 차지한 그 지역 사람들이 고구려를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나 단양적성비를 보면 신라가 그 지역을 이미 장악하고 신라의 행정 구역으로 편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고구려를 부모의 나라로 계속 생각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