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산성 | |||||
작성자 | 임** | 작성일 | 2017-07-13 | 조회수 | 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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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남한강이 보이는 성산의 정상부근을 돌로 둘러쌓은 산성이다.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平原王, 559∼590)의 사위인 온달장군의 이야기가 이 지방에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은 본디 언제 축성되었는지 확인되지 않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이미 성산성으로 고적화되었던 기록이 있다. 성의 북동쪽 산 아래 남한강의 강변 절벽 아래에는 온달굴이라는 석회암동굴이 있고, 성을 마주보는 북쪽 강 건너의 산에도 온달과 관계되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어서, 이곳이 신라와 고구려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던 곳임을 시사하고 있다. 성벽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고대 성곽의 축성법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온달산성은 온달이 배수진을 치고 신라군과 싸우기 위해 쌓았다고 전해져왔다. 그래서 이름도 온달산성이다. 그러나 남한강 건너 북서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의 위치나 북서쪽에만 문이 없고 성벽도 특히 높은 점, 성벽의 축조방식이나 배수구의 양식이 경주 남산성이나 보은의 삼년산성과 유사하거나 똑같은 점으로 보아 신라 쪽에서 쌓은 성으로 보인다. 즉 남쪽에서 진출해온 신라가 강 건너 북쪽을 노려보며 전초기지로 쌓은 단성면의 적성산성과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으로 축조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러므로 온달은 이 성을 쌓았다기보다 이 성을 치려다 전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 구조 온달산성의 둘레는 683m로 큰 편은 아니다. 치우친 봉우리와 북쪽으로 흘러내린 비탈을 둘러 쌓은 온달산성은 바깥쪽에서 보았을 때, 높이는 북벽과 남벽이 7~8.5m, 동벽이 6m가량이지만, 급한 비탈 위에 두께 4m쯤 되는 성벽을 쌓았으므로 안쪽에서 볼 때의 높이는 그 절반쯤이 된다. 비탈이 경사가 70도 남짓한 서벽의 경우에는 안벽 높이가 1m가량인 반면 바깥쪽은 10여m나 된다. 성벽은 납작납작하게 잘라낸 점판암(粘板岩)을 안팎으로 쌓았는데 벽면뿐 아니라 구석구석까지도 흙을 전혀 쓰지 않고 돌로만 쌓았다. 문은 동·남·북의 세 곳에 있었는데, 모두 특색이 있다. 동문 터는 문구부(門口部)의 너비가 7.3m의 수직절단면을 보여주고 있고, 북문 터는 너비 6m 정도인데 북동쪽 모서리를 곡성(曲城)처럼 처리하였다. 남문 터는 바깥쪽에서 보아 입면(立面)이 凹모양을 이룬 것으로, 성안과 바깥의 높이 차를 두고 사다리나 현문이 시설되었던 듯한 모습이다. 북문에서 가까운 성벽, 즉 성 둘레에서 가장 낮아서 안쪽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는 위치에 수구가 하나 있다. 바깥벽 바닥에서 1m쯤 되는 높이에 뚫린 수구는 위쪽 너비 25㎝ 아래쪽 너비 35㎝ 높이 65㎝인 사다리꼴이다. 수구 위쪽에는 다른 성돌보다 훨씬 크고 든든한 화강석을 고여 그 위의 성벽을 받게 하였다. 수구 안 바닥은 계단식으로 차츰 낮아져 내려오는데 맨 아래 놓인 돌이 성벽 바깥으로 튀어나와서 물이 성벽 밖으로 떨어지도록 되어 있다. ■ 고구려의 산성 고구려의 성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도 200여 개가 넘는다. 국내성이나 요동성 같은 평지성도 있고 평양의 장안성 같이 평지성과 산성의 혼합형인 평산성의 유형도 보이지만, 고구려의 성은 산 위에 혹은 산의 형세를 이용해 만든 산성이 대부분이다. 초기에는 주로 군사시설로서의 기능이 컸지만, 고구려의 영토가 확대되고 고대 국가로서의 틀이 잡혀가면서는 산성을 지방 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성 안에 관청을 두는 한편 주민들도 함께 거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초기에 구축된 산성들이 비교적 규모가 작은 데 비해 후기로 갈수록 규모가 커지는 형태로 발전했다. 고구려 성은 지세에 맞는 성벽과 성문, 장대, 치와 성가퀴, 수원시설, 수구문과 배수구, 기타 건물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수당 전쟁을 비롯한 여러 전쟁에서 보여준 뛰어난 고구려 성의 방어력은 견고한 성벽을 쌓는 축성법과 더불어 바로 이러한 고구려 성의 구조에서 비롯된다. 성문은 외부와의 통로이므로 적의 공격이 집중되기 쉽다. 그래서 고구려는 성문 주위의 성벽을 특히 높고 견고하게 구축했다. 또한 성문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문 주위의 성벽을 특히 높고 견고하게 구축했다. 또 성문 주위의 성벽을 U자형으로 들여쌓기도 하고, 성문 주위에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돌출시설인 ‘치’를 두어 방어력을 높이기도 했다. 성가퀴는 성벽 위에 아군이 몸을 숨기고 적을 향해 활을 쏘거나 공격하던 시설이다. 장대는 장수의 전투 지휘소로 성 안에서 가장 높은 곳이나 정문 근처에 설치되며, 성벽 곳곳의 전망이 좋은 곳에는 성 밖을 감시하는 초소인 망대를 설치했다. 때로 성의 가장 높은 곳에는 봉화대를 설치했으며, 장대와 망대 근처에서는 군사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 터가 발견되곤 한다. 산 위에 자리한 산성에서 중요한 것은 물의 안정적 공급인데, 고구려 산성의 경우 수량이 풍부한 계곡을 끼고 있거나 저수지와 우물, 혹은 빗물 저장시설이 빠짐없이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성벽이나 성문 아래 성 안의 물을 내보내기 위한 배수구가 설치되었다. 대형 산성의 경우 관청이나 일부 주민들의 일상적 거주를 위한 공간도 마련되었다. 산성이기 때문에 완만한 산비탈의 경사면을 깎아 계단 형태의 대지를 조성해 건물을 축조한 흔적이 남아 있다. 산성은 성곽이 위치한 지세에 따라 포곡식(包谷式) 산성과 산정식(山頂式) 산성과 그 둘을 혼합한 복합식 산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포곡식 산성은 계곡을 끼고 주위의 산능선에 성곽을 축조한 형태로 대체로 대형 산성의 경우 이러한 지세를 이용한다. 포곡식 산성은 성 안에 넓은 평탕지를 확보하고 있어 병력뿐 아니라 일반 주민들의 거주공간이 마련될 수도 있었다. 산정식 산성은 산 정상부의 평탄면을 이용하여 주위에 성곽을 두른 형태로, 집안과 환인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초기 산성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흘승골성을 비롯해서 흑구산성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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