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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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작성자 강** 작성일 2014-04-04 조회수 1350
* 국립중앙박물관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국립박물관. 역사의 고증 또는 문화예술의 참고가 될 만한 유형문화재를 수집 보관하여 일반에게 공개 관람시키는 한편, 유적?유물 등을 조사, 연구하기 위하여 문화관광부장관 소속 하에 설치되었다. 소장유물은 13만 4074점(1999년 10월 31일 현재)이다. 박물관 구성은 관장 밑에 학예연구실과 사무국이 있고, 학예연구실은 유물과?고고부?미술부가 있으며, 사무국은 섭외교육과?서무과?관리과?도서실로 나뉘어 있다. 한국 최초의 박물관은 1908년(순종 2) 창경궁 내에 설치된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으로 왕실의 재정적 뒷받침을 받아 고미술품과 고고유물을 수집하여 1909년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15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안에 건립했던 미술관을 총독부박물관으로 개관하였으며, 38년에는 덕수궁 석조전 서남쪽에 이왕가미술관을 건립하여 이왕가박물관에 있던 미술품을 덕수궁으로 옮겨 일본 근대미술품과 함께 전시하였다. 이 미술관은 8?15이후 문화재관리국 산하의 덕수궁미술관으로 운영되었다가 69년 국립중앙박물관에 통합되었다. 지방에서는 29년 경주고적보존회의 전시관이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편입되었고, 39년과 40년 부여?공주고적보존회의 전시관들도 각기 분관으로 편입되었다. 45년 광복 이후에는 총독부박물관을 인수하여 최초의 국립박물관이 설치되었고 그해 12월 3일 개관식을 가졌다. 50년 6?25때는 피해를 막기 위해 소장품을 부산으로 옮겨 분산시켰고, 서울 남산(南山)에 있던 민족박물관을 국립박물관 남산분관으로 옮겼다. 전쟁이 끝난 53년 경복궁으로 복귀했다가 남산 민족박물관 자리로 이전하여 54년 개관했다. 같은 해 덕수궁 석조전으로 다시 이전하여 55년 개관했고, 72년 경북궁 안에 새박물관을 건립하여 이전했다가 86년 옛 중앙청건물로 다시 이전한 뒤 개관했다. 95년 8월 15일에는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옛 총독부건물 철거가 시작되어 박물관이전계획을 추진한 결과 2003년 용산(龍山)가족공원에 세워질 새 박물관 설계구상이 발표되었으며, 새 박물관이 완공될 때까지 옛 문화재관리국건물을 전시관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새 박물관은 지상 6층 지하 1층, 연건평 4만여 평으로 1만 4000점 이상의 유물을 전시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한편 박물관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설치되었던 지방박물관들도 점차 독립하여 문화관광부 직속기관으로 개편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유물은 국내의 역사?고고학?미술사?민속 등에 관한 자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밖에도 민족항일기에 평양지방에서 발굴된 낙랑유물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수집된 서역유물이 소장되어 있고 신안해저에서 끌어올린 방대한 양의 원(元)나라 유물이 있다. 유물의 전시는 고고학?미술사?역사 전반을 통한 한국 문화발전의 큰 줄기를 이해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으며, 특별전시를 통해 특수한 국내외의 문화를 집중 또는 재조명하고 있다. 국내전시 외에도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를 해외에 고양시키기 위하여 세계박물관협의회(ICOM) 회원으로서 여러 나라에 한국 문화재 대여 전시회 등을 여는 한편, 각종 특별전시회를 열고 있다. 57년 12월부터 59년 6월까지 미국 8개 도시에서 국보급문화재 해외전시회를 가졌으며, 61년 3월부터 1년 2개월에 걸쳐 영국?프랑스?네덜란드?독일?오스트리아에서 중요문화재 해외순회전시를 하였다. 또한 76년 2월부터 7월까지 일본 도쿄[東京]?교토[京都]?나라[奈良]에서, 79년 5월부터 81년 10월까지는 미국 뉴욕?샌프란시스코?시애틀 등의 주요 도시에서 <한국미술 5천년 전>을 개최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46년 경주 호우총 발굴이래 여러 차례 유적?유물 발굴과 각종 학술조사를 실시하여 보고서를 간행하고 있으며, 박물관특설강좌?박물관대학 등을 운영하여 전통문화의 보급에 힘쓰고 있다. ☞ 국보 86호 경천사지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 높이 13.5m. 국보 제86호. 현재 경복궁 안에 건립되어 있으나 이것은 1960년 현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며, 본래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련리의 경천사지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1909년경 우리나라에 대사로 와 있던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田中光顯)에 의하여 일본 동경(東京)으로 불법반출되었다가 그 뒤 반환되어 오랫동안 경복궁 근정전회랑에 방치되었는데, 1959년 재건에 착수하여 1960년 완공을 보게 되어 현 상태로 보존하게 된 것이다. 이 석탑은 부재(部材) 전체가 회색의 대리석인데, 현 지대석은 본래의 것이 아니고 재건 때에 맞춘 것이다. 탑의 구성은 기단부 위에 탑신부와 상륜부가 건조되었는데, 각 부는 그 평면과 부재의 구조 등에서 각기 특수한 건조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3층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평면은 사면두출성형(四面斗出星形)의 亞자형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각 층의 면석에는 각기 불(佛)?보살?인물?초화(草花)?반룡(蟠龍) 등을 조각하였으며, 각 모서리〔隅角〕에는 절목원주형(節目圓柱形)을 모각하였다. 갑석은 각 층이 같은 형식으로서, 측면은 굽형을 노출시키고 상하에는 연화문을 조식하였는데, 삼층의 갑석만은 상단부에 난간을 돌리고 그 위에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다른 일반형 석탑에서의 탑신 굄대와도 같은 의장(意匠)의 가구(架構)인 것 같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졌는데, 초층과 2?3층은 기단부와 같이 사면 두출성형의 亞자형을 이루었고 그 위의 4층부터는 방형이다. 4층부터의 체감은 없는 편이나 초층과 2?3층에서는 감축(減縮)을 느낄 수 있다. 탑신의 구조는 각 옥신 위에 옥개석을 겹겹이 쌓았는데, 옥신석의 각 모서리에는 원주형을 모각하고 각 층, 각 면에는 십이회상(十二會相)을 조각하여 불?보살?천부(天部), 기타의 문양을 빈틈없이 전면에 조각하였다. 그리고 각 층 옥신석 하단부에는 높직한 난간을 돌리고 있는데, 이것도 옥신굄의 의장일 것으로 여겨진다. 각 층의 옥개석은 하면에 다포(多包)집 형식의 두공(枓慊) 형태를 모각하고 상면 낙수면부는 팔작(八作)집 형태의 지붕모양과 기왓골이 표현되어 목조건축물을 연상하게 한다. 특히, 3층은 이중의 옥개를 이루고 있어서 마치 화려한 전각을 모조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각 층의 추녀도 전각부(轉角部)에 이르면서 곡선을 보이고 반전을 일으켜서 경쾌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상륜부는 단조로운 형식으로 평면은 원형이며, 노반과 연주문형(連珠文形)의 복발, 그리고 앙련(仰蓮)으로 된 앙화(仰花)가 있고 그 위에 보탑형(寶塔形)과 보주가 있다. 그런데 이들 상륜의 각 부재는 그 형태가 우리 나라 탑의 상륜형식(相輪形式)과는 달리 원대(元代)의 나마(喇魯 : 티베트)수법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고려대의 불교와의 관련성을 말해 주는 좋은 예이다. 일설에 따르면, 이 탑은 원의 승상이던 톡토(脫脫)라는 사람의 발원에 따라 진녕부원군(晋寧府院君) 강융(姜融)이 나라의 안녕과 원 황제와 황후와 황태자의 수복을 빌기 위해 원의 장인들을 불러와 만든 것이라 한다. 이 석탑은 세장(細長)하고 또한 불안정한 느낌을 주는 것 같으나 3단의 기단부와 3층까지의 탑신이 안정된 亞자형을 이룬 평면이고, 또 3층까지의 체감이 뚜렷하여 오히려 경쾌하고 날씬한 가운데 안정감을 주고 있다. 그리고 각 부재(部材)세부의 조각은 부분에만 그치지 않고 기단 탑신부 할 것 없이 전면에 가득 차 있는데, 이들 조식(彫飾)은 장려하고 변화가 많으며, 전체의 균형 또한 우미하여 고려시대의 석조탑파 중 가장 특이하고도 정련한 기교를 보이고 있다. 초층 옥신 이맛돌에 조탑명(造塔銘)이 새겨져 있는데, ??至正八年戊子三月日(지정8년무자3월일)??이라는 기명(記銘)에 의하여 그 건립연대가 1348년(충목왕 4)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은 이 탑의 양식 수법을 계승한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國寶 6-塔婆-(秦弘燮 編, 藝耕産業社, 1983), 文化財大觀 1-國寶-(韓國文化財保護協會, 大學堂, 1986). 『황화에서 천산까지』 김호동. 1999. 사계절. ☞ 국보 100호 남계원칠층석탑(南溪院七層石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 높이 7.54m. 국보 제100호. 경기도 개성시 덕암동 남계원 터에 있던 것으로, 1915년 기단부를 제외한 탑신부만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그 뒤 원래 위치를 재조사한 결과, 지하에서 이중으로 구성된 기단부의 잔석(殘石)이 발견되어 추가로 이전하여 탑신부 옆에 따로 놓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탑이 있던 곳이 과거에는 개국사(開國寺) 터로 알려져 탑의 이름도 개국사탑으로 불려왔으나, 오늘날에는 개국사터는 다른 곳에 있고 이곳은 남계원터로 밝혀져 탑의 이름도 현재의 이름으로 고쳐졌다. 탑의 구조는 2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형성한 것으로, 외견상 신라석탑의 전형을 지키고 있는 듯하나 세부적으로는 양식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여러 개의 석재로 구성된 기단부는 현재 몇 개가 결실되었으나, 하층기단 면석은 신라시대의 일반형 석탑보다 훨씬 높아졌고 상대적으로 상층기단은 약간 낮아진 듯하다. 상하층 갑석(甲石)은 부재(部材)가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으므로, 현재는 하층기단 면석과 상층기단 사이의 하층기단 갑석 자리에 상하층 기단 갑석을 함께 놓았는데, 상층기단 갑석은 하면에 부연(副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정연하고 다듬은 솜씨도 세련미를 보이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을 각기 1석씩으로 조성하였으며, 각 층 옥신에는 각 면에 양쪽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가 모각되었는데, 낮게 각출하여 신라석탑의 예리하게 모각한 것과는 달리 퇴화된 일면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은 각 층이 같은 수법을 보이는데, 아랫면에 3단씩의 옥개받침이 낮게 조출되고, 윗면에는 아무런 굄대도 없이 그 위층의 부재를 받고 있다. 낙수면은 평박(平薄)하나 아랫면의 받침부가 낮아서 중후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추녀가 두꺼워지고 전각부(轉角部)에 이르러서는 윗면에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반전되듯이 하단부도 이에 따라 반전되어, 이른바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석탑은 신라석탑의 경쾌한 느낌과는 달리, 전각의 굴곡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경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상륜부는 탑신 정상에 한 개의 돌로 조성한 노반(露盤)과 복발(覆鉢)뿐이고, 그 이상의 부재는 없어졌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2층 이상의 탑신부 각 층의 감축률은 낮은 편인데, 웅건한 기풍과 정제된 결구수법을 보여서 고려시대 석탑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각 부분의 수법과 양식이 상하가 모두 일치하지 않는 점에서, 후세에 보수된 탑이 아닌가도 추측된다. 1915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할 때 탑신부에서 7축(軸)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 紺紙銀泥妙法蓮華經≫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고려 제25대 충렬왕 때의 사경(寫經)으로 추정되며, 1283년(충렬왕 9) 중수 때 넣은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韓國塔婆硏究(高裕燮, 同和出版公社, 1981), 文化財大觀 1-國寶 1-(韓國文化財保護協會, 大學堂,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