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내 건물 | |||||
작성자 | 강** | 작성일 | 2014-04-04 | 조회수 | 15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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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화문
1395년 태조 4년에 처음 지어진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왕실과 국가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던 문이었다. 하지만 1926년에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의 하나로 조선 총독부 청사가 들어서면서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때 화재로 문루 부분이 소실되어 석축만 남게 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68년에 석축을 모아 원래 위치로 옮기고 문루 (門樓) 부분은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세웠으며, 현판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로 바꾸었다. 경복궁의 외곽성은 외적에 대한 방어 목적보다는 궁궐에 위엄을 더하고 궁전을 호위할 목적으로 축조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낮게 쌓고 그 둘레의 동서남북에 각각 성문을 만들었다. 그 중 광화문은 남문에 해당한다.
2) 흥례문
흥례문 일곽은 1910년경부터 훼손되기 시작하여, 일제가 조선총독부 시정 5주년기념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상당부분 철거 변형되었으며 1916년 조선총독부 청사건립으로 완전 철거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1915년 물산공진회 개최시에는 경복궁의 전반부를 전시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상당수의 전각이 변형 철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흥례문 일곽과 담장도 훼철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에 흥례문과 주변행각, 유화문, 영제교 등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1998년 9월 23일 상량하여 2000년에 준공하였다. 광화문과 근정문의 남북중심축선상에 위치하며 2층 건물로 상하층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중앙어칸이 좌우 변칸보다 2척이 더 넓은 18척으로 근정문과 비슷하다.
중층 다포계 겹처마 우진각지붕으로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마루 양단에는 취두를 상하층의 추녀마루에는 용두와 용두아래로 7개씩의 잡상을 배치하고 사래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동측면의 내부쪽으로는 이층으로 오르는 목조계단이 설치되었다. 중앙기둥열에는 두짝씩의 판문을 달았다. 공포는 다포계 공포를 구성하고 있다. 하층간포는 도리통에는 어칸은 3구, 좌우협칸에는 2구씩, 양통 2칸에는 1구씩의 간포를 설치하였다. 상층간포는 도리통 어칸은 3구, 양협칸에는 2구씩, 양통 2칸에는 1구씩의 간포를 설치하였다. 공포구성은 하층은 내3출목 7포작 외2출목 5포작이고, 상층은 내외 모두 2출목 5포작이다.
3) 근정문 (보물 제812호)
광화문을 들어서서 수문장청을 지나면 남행각 중앙에 자리잡은 흥례문에 이른다. 흥례문을 지나면 서쪽에서 동편으로 흐르는 어구가 있고 보도에 이어 돌다리 영제교가 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근정전일정과 행각 중앙에 중문으로 높이 솟은 근정문이 있다. 고종 4년에 중건한 것이다. 정면에서 보면 3칸인데 아래층엔 문얼굴을 내고 큼직한 문짝을 달아 여닫게 하였고, 위층은 사방에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는 시설을 하였다. 평소엔 문을 닫아 두고 대소의 신료들은 문무반에 따라 동쪽의 일화문과 서편의 월화문을 이용하였다. 현존하는 조선왕궁의 정전 정문 중 유일하게 중층 건물로 남아 있다.
4) 근정전 (국보 제223호)
경복궁의 수조정전이며 문무백관의 조하를 비롯한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법전으로, 태조 3년(1394)에 창건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에 재건하였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여러 국왕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근정전은 상·하 월대 위에 이층으로 지은 거대한 건물이다. 건물 내부는 아래 위층의 구분을 없이 하여 넓고 높다. 중앙에 임금이 좌정 하던 어좌가 있다. 실내에 가득 의장기물이 장치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근정전 둘레에 이간통의 행각이 있고 남행각 중앙에 다락문인 근정문이 있다. 옛날엔 근정문 남쪽에 흥례문, 그 남쪽에 정문인 광화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동행각에서 남행각으로 꺾이면서 두 번째칸 기둥 앞에 서서 약간 굽힌 자세로 바라다보면, 근정전의 우람한 자태와 처마곡선이 북악산의 흐르는 선과 조화되어 선율을 이룬다. 근정전을 바로 이 자리에 자리잡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5) 천추전
사정전의 서쪽에 있고 동편의 만춘전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천추전은 고종 4년에 사정전과 더불어 중건되었다. 임란 이전의 천추전은 문화창조의 요람이기도 하였다.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을 창제할 때 이 전각을 즐겨 이용하였다. 또한 이 전각에서 1452년 문종이 승하하였다. 천추전은 평면이 24칸에 불과한 작은 건물이다. 공포는 무익공이고 기둥 높이는 9자이다. 사정전의 기둥 높이가 15자이고 공포도 내7·외5포의 다포계로 격조를 한껏 높인 것에 비하면 아주 조촐한 법식에 따라 지었다.
6) 사정전
근정전의 뒷층계를 내려서서 사정문을 지나면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짧은 세장(細長)한 구역이 있고, 그 중앙에 편전(便殿)인 사정전이 세벌대 높은 댓돌 위에 섰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 겹처마 팔작기와지붕의 구조이다. 고종 4년(1867)에 중건되었는데 사정전 동쪽에 만춘전, 서쪽에 천추전, 남행각에 사정문, 동행각에 득영문, 서행각에 숭현문이 있었다.
7) 만춘전
사정전 서쪽의 천추전과 똑같은 규모로 동쪽에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6.25 때 피해를 입어 댓돌 위에 기둥을 세웠던 주초석들만이 남아 있었는데 1988년 옛 모습대로 재건했다. 사정전에 비하면 그 양식이나 수법이 검소하게 꾸며졌다.
8) 자선당
<동국여지승람> 제1권 경도에 보면 「자선당은 융문루 남쪽에 있는데 동궁이 서연(書筵)으로 쓰는 곳이다」하여 임진왜란 전후의 위치가 달랐던 것으로 보여진다. <북궐도형>에는 자선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합 28칸이고 중앙부 6칸은 대청, 좌. 우 2칸씩은 온돌방이며 둘레의 툇간은 방, 퇴로 구성되었다.
9) 수정전
세종 때 경회루의 남쪽, 천추전의 서쪽에 보루각과 흠경각, 집현전을 지었는데, 이 전각들이 임진왜란 때 불타자 그 자리에 고종 4년 수정전을 중건하였다. 규모가 40칸으로 현존하는 경복궁내의 전각으로는 가장 칸수가 많다. 동복도 13칸, 서복도 9칸과 동행각 33칸, 서행각 33칸, 남행각 33칸, 북행각 30칸, 중행각 22칸, 동외행각 20칸, 서외행각 20칸반의 행각이 있었다. 대한제국의 군국기무처로 사용된 바 있고, 1895년 1월부터는 내각청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수정전 이웃에는 대전장방, 내반원, 수라간, 정원, 빈청, 선전관직방, 검서청, 옥당, 약방, 의관방 등의 건물이 즐비하였다. 지금은 수정전 만이 홀로 남아 있다.
10) 경회루
경복궁 창건 시 태조는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경회루라는 다락집을 세웠다. 태종은 12년(1412)에 공조판서 박자청에게 연못을 넓히고 다락도 크게 짓도록 하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연못 속에 큰집을 짓는 일에 반대하였으나 박자청이 마침내 이룩하니, 네모 반듯한 섬을 장대석으로 호안(護岸)하여 경회루를 세우고 돌다리 셋을 가설하여 물과 연결시켰다. 48개의 돌기둥에 용을 새기고 못 속에 또 섬 두 개를 더 만들어 당주(當洲)를 삼았다.
임진왜란 때 불탄 자리엔 돌기둥만이 남아 있었는데, 고종 4년(1867) 경복궁 재건 시에 경회루도 중건하였으나 옛날처럼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는 장엄은 베풀지 못하였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 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다락집 건물로는 경회루가 국내에서 제일 규모가 큰 것에 속한다.
11) 영추문
동쪽이 봄이면 서쪽은 가을이다. 궁의 서문은 가을을 맞는다고 하여 영추문이라 이름지었다. 원래 문밖에 명당수가 흐르는 맑은 개울이 있었으나 지금은 복개되어 보이지 않는다. 문안에 수문장청, 소궁청, 직소, 루국(漏局), 내사복이 있고, 궁의 담 끝에 서십자각이 있었다. 홍예문이 하나 열린 육축 위에 단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1950년대에 무너졌던 것을 1970년대에 재건했다.
12) 건춘문
경복궁의 동문(東門)으로 동쪽은 봄에 해당한다는 의미에서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육축을 높이 쌓고 중앙에 홍예문 하나를 열었다. 공포는 이익공이며 처마는 겹처마, 지붕은 기와를 이은 우진각이다. 조선조의 척도인 영조척(營造尺)으로 홍예 높이 16.5자이고, 너비는 15자이다. 이는 15자 사방의 정방형에서 그 대각선 길이 16.5자를 홍예의 높이로 설정한 수치인 것이다. 이간통(二間通)의 3칸인데 기둥 높이 8자이고, 3칸 중 중앙칸은 17자, 좌우협간은 8자로 합계 33자이다. 이때의 측면 2칸의 간살이 넓이는 각각 8자 2치 5푼식으로 합계 16자 5치가 된다. 긴 변과 짧은 변과의 비례 설정에 따른 계산에서 채택된 수치들이다.
13) 강녕전
강녕전은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로 초익공의 팔작 지붕이다. 왕의 침전이므로 용마루가 없다. 전면에 퇴가 개방된 중앙어칸은 마루로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강녕전 일곽은 1920년 창덕궁의 복원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에 복원하였다. 강녕전 전면과 후면으로 좌우에 같은 규모와 형태의 2개의 전과 2개의 당으로 구성되었다.
14) 교태전
왕비의 침전으로 강녕전 일곽에서 양의문을 들어서면 정면9칸, 측면 7칸 규모의 교태전과 좌우로 익랑이 연결된다. 아미산을 볼수 있도록 동쪽 후면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15) 아미산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후원이다. 아미산이란 중국의 명산을 상징하는 이름인데, 여기서는 산이 아니라 사방에 장대석으로 단을 쌓아 만든 것이며, 남쪽에는 4단의 화계가 조성되었다. 이 화계의 단에 괴석, 방형석지, 연화형 수조, 해시계대, 돌절구, 화전장식 굴뚝 등이 배치되고, 매화, 모란, 앵두, 반송, 철쭉 등의 화목을 심었으며, 단 위에는 배나무, 뽕나무, 느티나무, 말채나무 등이 원림(苑林)을 이루고 있다.
16) 자경전
교태전 동쪽 자미당(紫微堂) 터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조대비(神貞翼王后)를 위하여 자경전을 지었다. 준공 후 불이 나서 다시 지어 고종 25년(1888)에 완성한 것이 지금 남아 있는 일곽이다. 고종 때 지은 침전 건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44칸의 자경전은 따뜻하게 겨울을 지낼 수 있도록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인 욱실형의 복안당과 낮시간에 거처하는 중앙의 자경전과 여름에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동남의 다락집 청연루(淸嘗樓)로 구성되고, 이어 1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부설되어 있다. 둘레에 수십간의 행각과 담장과 일각문들이 있고 후원의 십장생 무늬를 베풀고 연가를 설치한 굴뚝이 있는 담장과 서편의 꽃담이 아름답다.
17) 함화당
집경당의 서쪽에 있으면서 서로 내부에서 왕래할 수 있게 구조된 복도삼간으로 이어져 있다. 규모는 17칸이고 2칸의 내루가 있는 오량집이다. 옛날엔 복도 남쪽에 샛담이 있고 계명문이라는 일문과 영춘문이라는 월문이 있었다. 또 서행각 8칸과 남행각 11칸, 외행각 13칸이 있었고, 영지문(迎祉門)·창무문(彰武門)이 일각문으로 열린 간장(間墻) 들이 더 있었다. 지금은 다 없어지고 함화당만이 남아 있다. 홑처마의 팔작기와지붕의 구조이다.
18) 집경당
집경당은 함화당과 침전 중의 하나이던 흥복전에 예속된 건물이다. 아미산의 북쪽에 흥복전 일곽이 있고, 그 북쪽에 광원당이, 광원당 북쪽에 집경·함화당이, 그 이웃에 영훈당이 있었으나 다 없어졌다. 지금은 집경·함화당만이 남았다. 경복궁에 총독부박물관을 지을 때 집경당과 함화당이 박물관 사무실로 이용되었다. 집경당은 28칸반 규모의 이간오량집으로 내루가 있으며, 동행각은 6칸에 봉양문(鳳陽門)이 있고, 서행각은 5칸에 백상문이 있으며, 남행각은 10칸으로 향명문(嚮明門)이 있고, 북행각은 9칸반, 반반간이었다. 그 북쪽 담장에는 일각문인 응복문(應福門)이 있어 서쪽의 함화당으로 통하게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19) 향원전
함화당의 북쪽에 장안당이 있었다. 이 집의 북행각은 북쪽 궁성에 가까워서 북행각의 문을 나서면 궁성의 암문(暗門)인 계무문(癸武門)에 이르렀었다. 이 장안당 동편에 곤령각(坤寧閣)이 있고 그 북쪽에 복수당(福綏堂)이 있었는데, 이 집 남행각의 문밖 즉 건청궁의 남쪽에 연못이 있다.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경영할 때 그 남쪽에 못을 파고 그 안에 섬을 만들어 이층의 육모정인 향원정을 짓고, 나무로 구름다리를 걸어 취향교(醉香橋)라 하였다. 향원정은 보통 이층이라 하지만 누마루 밑의 구조까지 치면 삼층이 된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옛날엔 이 다리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게 되었었다.
20) 명성황후 시해당한 장소
청일전쟁이 끝난 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세력을 배척하자 고종 32년(1895)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의 사주를 받은 일인(日人) 자객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경복궁 후원 옥호루(玉壺樓)에서 명성황후와 많은 상궁을 살해하였다. 명성황후라는 시호(諡號)는 광무원년(1897)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처음 남청량리에 장사(葬事)하였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홍릉(洪陵, 경기도 금곡)에 이장하였다. 사진의 비석(碑石)은 1981년 11월 명성황후 순국숭모비건립위원회에서 명성황후의 순국을 애도하여 경복궁내의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에 세운 것이다.
21) 집옥재
고종 10년(1873)에 건청궁(乾淸宮)을 지을 때 함께 창건한 건물로 추정 된다. 지금의 자리로 이전된 것은 고종 28년(1891)7월 이후였고, 고종 30년엔 집옥재에서 각국의 사신들을 접견한 바 있다. 집옥재는 높은 댓돌에 큼직한 삼구의 석계를 설치하고, 그 위에 한단을 더 설치하여 고형(鼓形)주초석에 둥근 두리기둥을 세웠다. 평면은 20간이고 집은 맞배지붕형이며 좌우 박공 아랫 벽은 전(塼)으로 초담을 쌓았다. 마치 중국집의 구조와 같은 벽돌담이다.
22) 신무문
경복궁의 북문으로 고종 2년(1865) 중건되었다. 항시 닫아 두었다가 왕이 어원에 거동할 때나 특별한 경우에만 열었다 하는데 6.25동란 때 문루의 일부가 파손되어 보수하였으며 <고종실록>에 의하면 현판 서사관(書寫官)은 이현직(李顯稷)이라 한다. 단간의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문루를 세웠으며 2익공 양식에 우진각 지붕으로 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은 그 홍예의 높이와 폭, 문루의 평면과 주칸 등이 모두 같은 규모로 되어 있어 정문인 중층의 광화문을 제외하고는 이들 세 문은 모두 규모나 가구, 구조수법(架構.構造) 등을 같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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