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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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궁지(高麗宮趾)
작성자 강** 작성일 2014-03-25 조회수 850
* 고려궁지(高麗宮趾) 고려왕조가 몽고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 6월부터 개경으로 환도한 원종 11년(1270)까지 39년간 머물렀던 궁터이다. 대몽항쟁은 그토록 지나한 싸움이었다. 강화로 천도한 고료는 2년 후인 1234년 궁궐과 관아와 건축을 모두 마쳤다. 『고려사절요』에 “최우는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하여 이곳에 궁궐을 지었다. 규모는 비록 작으나 송도의 궁궐과 비긋하게 지었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경을 그리워하며 저항의지를 키워 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실낱 같은 고려의 운명을 지켜온 궁터이다. 당초에는 행궁?이궁?가궐 등의 여러 궁궐과 정궁이 있었던 너른 터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고려궁터의 정확한 범위와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궁궐 정문에는 승평문(昇平門)이, 그 양쪽에 3층루의 문 두 개가, 동쪽으론 광화문(廣化門)이 있었으나 1270년 환도할 때 모두 허물어졌다고 한다. 고려궁터엔 건축기단과 돌계단이 남아 있고, 고려 시대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조선 인조(1631)는 옛 고려궁터에 행궁을 건립하고 전각과 강화유슈부?규장외각 등을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함락되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완전 소실되는 등 수난의 역사가 되풀이되었다. 현재 들어서 있는 이방청과 동헌 등은 조선시대 강화유수부의 건물들로 고려궁과는 무관한 건물들이다. 그런데 현재 고려궁터가 들어서 있는 땅의 규모는 2,279평에 불과하지만, 1783년 강화유수 김노진이 편찬한 조선시대 『강화부지』에 실린 궁전배치도에 의하면 북문 아래 왼쪽부터 행궁?외규장각?장령전?만령전, 그 앞에서 왼쪽으로 천추문?이아(貳衙, 유수 보좌관의 집무소)?객사?상아 들의 건축물이 들어서 있었다. 현재 왼쪽 잔디밭 너머로 둘러쳐진 담장 밖의 너른 터가 모두 행궁터였던 것이다. 이 궁전배치도는 물론 조선시대 행궁배치를 말하는 것이고, 고려시대 궁터와 그 범위가 일치하지는 않을 수 있다. 다만 중심 궁터는 고려궁터와 조선행궁터가 일치한다. 궁터가 상당 부분 축소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 강화 전적지 성역화 때 몽고군에 저항했던 고려시대 무인정권의 의지와 정신을 강조하다가 조선시대 역사 자료는 소홀히 했다고 전해진다. 영역이 분명하게 밝혀진 조선시대의 너른 행궁터를 성역으로 잡고 고려시대 궁터였음을 강조했다더라도 지금처럼 옹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려궁터는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