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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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訟廣寺)
작성자 임** 작성일 2017-07-13 조회수 261

 

개요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 하나인 승보사찰로서 신라 말 혜린선사(慧璘禪師)에 의해 창건되었다. 창건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적당한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 때 석조(釋照)대사가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게 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 년 동안 버려지고 폐허화된 길상사가 중창(重創)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부터 이다. 지눌은 9년 동안의(명종 271197~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때 길상사로 정혜결사로 옮겨지면서 수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가까운 곳에 정혜사라는 절과의 혼돈을 피하기위해서 바꾸었고, 산 이름도 송광에서 조계로 바꾸었다. 뒤에 절 이름도 수선사에서 송광사로 불리게 되어 조계산 송광사로 되었다. 지눌이 타계한 다음 혜심(慧諶)이 수선사의 전통을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고 강종(康宗)이 소식을 듣고 명을 내리어 절을 크게 증축하였다. 혜심(慧諶)이후 조선시대 초기 16국사의 마지막 분인 고봉화상이 원을 세워 유서 깊은 도령을 중창하기 시작했고, 고봉의 뜻을 계승하여 중인선사가 중창 불사를 완성하여 90여 칸의 증축을 하였다. 정유재란으로 침입한 왜군이 불을 질러 역사적 도량은 일시에 잿더미로 변하였다. 이후 응선(應禪)화상이 복구의 손을 대기 시작하였고 지리산에 있던 부휴 대사와 함께 불사를 완성했다. 현종 8(1842)에 큰불이 나서 대웅전을 비롯한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이는 정유재란 이후 두 번째 겪는 수난이었다. 불이 난 이듬해 절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시작되어 철종 7(1865)까지 14년의 시간이 걸려 1250여 칸이 다시 세워졌다. 1969년 조계총림이 발족하면서 방장 구산스님이 1983년부터 1990년까지 8년여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하여 30여동의 저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도량의 모습을 일신하고 승보 종찰로서의 위용을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 사찰 중 하나인 승보사찰로서 전국 사찰 가운데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이다.

 

구조

송광사는 국사전, 하사당, 약사전, 영산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송광사는 산지의 비탈을 이용한 두 개의 큰 석축을 기준하여 맨 위쪽이 수선(修禪) 영역 가운데가 대웅보전 영역 아래쪽에 우화각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영역 세 영역으로 나뉘며 전각 50여동의 대웅보전과 그 앞마당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드리듯 모여 있다.

국사전은 16국사의 영정을 모신 일종의 조사당으로, 원래는 선방(禪房)으로 만들어진 건물이었다. 1369년에 처음 건립되어 두 차례에 걸쳐 고쳐지었고, 하사당과 같은 시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간략한 주심포 구조를 채용하고 있으며, 직선적이고 소박한 맞배지붕의 형태와 4칸 짝수 칸을 채용한 규모가 고려 말, 조선 초의 감각을 전해준다.

약사전과 영산전은 법성요 뒤쪽 좁은 곳에 나란히 서 있다. 17세기 중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약사전은 단칸의 작은 법당이지만, 화려한 다포를 사방에 두르고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마치 다포계 건축의 최소 구조를 보여주는 모형과 같이 다포계 건물의 특징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하사당은 응진전 앞에 있는 승방으로 앞면 3, 옆면 2칸의 규모로 남쪽 2칸은 온돌방이고, 오른쪽 1칸은 부엌이다. 145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국사전과 유사한 주심포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사당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승방 건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고, 평면 형식이나 부엌 위의 환기용 돌출지붕 등 이 지역 민가 건축을 수용한 점도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