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晋州城) | |||||
작성자 | 강** | 작성일 | 2014-03-24 | 조회수 | 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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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晋州城)
지정번호 : 진주성 사적 118호
가야의 터전이었던 이곳 진주는 삼국의 각축기에는 백제에 속하여 거열성(또는 거타성)이었으며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이다.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되어 있는데, 내성은 1,930척 외성은 1만330척이다. 삼국시대에는 거열성(居烈城),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萬興山城), 고려시대에는 촉석성(矗石城), 조선시대 이래로는 진주성(晋州城) 또는 진양성(晋陽城)으로도 불리었다. 신라의 문무왕이 삼국 통일하면서 주를 설치하고, 신문왕때는 거타주를 나누어 진주총관을 두었다. 경덕왕때에 와서는 경주로, 혜공왕때는 청주로 고였다가 고려 태조때 또 다시 강주로 부르고, 성종14년(995)에 진주로 바꾸었다. 진주성은 옛 기록에는 촉석성으로 불렀던 것으로 석축으로 된 성의 둘레가 약 1.321M(4359척), 높이는 약 5m(15척)이며, 성 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3개 있고, 군창이 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서 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하륜(1347-1416)의 성문기에 보면 성이 옛터만 남아 언제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는데,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고려 우왕 3년(1377) 가을에 성을 수리하였다고 했다. 이때 성의 둘레는 800보이고 성의 높이는 약 8m를 넘고 의정문(서쪽), 지제문(북쪽), 예화문(남문)이 있었으며, 성밖은 서쪽에는 청천이 남쪽에는 긴 강(남강)이 흘렀으며, 북쪽에는 3개의 못이 있는데 성과 못 사이에는 참호를 파서 성에 접근하려면 어디서나 물을 건너야만 되도록 하였다. 하륜의 소년시절에 이 성벽은 무너진 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진주는 일찍부터 왜구의 노략이 있어 성벽을 다시 쌓는 일이 시급하여, 이에 향인들이 옛터에 성벽을 축조했지만 곧 무너지니 1437년(세종 19) 관민이 합세하여 완성시켰는데 그 모습이 웅장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은 이 성을 포위하여 일곱 차례에 걸쳐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진주성의 군관민들은 장렬한 항쟁을 하여 승리를 하였으니 이는 남강(南江)에 쌓은 성벽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이때의 성은 촉석성이었으며 지금의 내성에 해당된다. 1593년 6월29일 이 성벽에 의지한 큰 싸움에서 진주성은 왜군에게 함락된 바 있다. 외성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으로 축성되었다. 1608년에 창원에서 옮길 것을 품의하여 윤허를 받고 축조한 것인데, 성벽높이 25척, 둘레 1만330척으로 대규모이다. 옛 북문과 신북문 및 남문에도 옹성(甕城)을 축조하고 근대전에 적합하도록 하였고 내성에 이어 지금 진주시를 포위할만한 넓이로 자리잡았다. 이 성의 외곽으로 물이 담긴 호(濠)를 파서 남강에 연결되도록 하였다. 내외성에는 내수문(內水門)?외수문 ?암문?척석문?서문(西門)?내북문(內北門)?촉석루?함옥헌(涵玉軒)?서장대(西將臺) ?포루?진남루(鎭南樓)?산성사(山城寺)?창렬사(彰烈祠)?충민사(忠愍祠)?화약고? 관덕당(觀德堂)?공신당(拱辰堂)?포정사(布政司)?군기고?중영궁(中營宮) 등이 있다. 이 성과 그 주변에는 선사시대 이래의 각 시대 유물들이 출토되는 고분과 유적지가 많이 있다. 특히, 진주성전투는 행주산성전투?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고려말에 왜구 방어의 보루로 고쳐 쌓은 이 성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막는 관문이 되었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제 1차 진주성 싸움을 드는 것은 적은 군사로 10배에 가까운 왜적을 물리쳤을 뿐 아니라. 이 성을 지킴으로써 호남을 지킬 수 있었던 때문이다. 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중과부적인줄 알면서도 6만여명의 군, 관, 민 전원이 전사하는 비운을 당한 것도, 그들 모두가 한 목숨 내던져 이성을 지킴으로 호남 진출을 막고자 했던 까닭이다. 1979년부터 정화 사업을 펼쳐 진주성은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 북장대(北將臺) : 진주성의 서쪽에 있는 높은 봉으로 진주시 서부 일대를 한눈으로 볼수 있는 중요한 곳이다. 서쪽의 성을 지키기 위해 1584년(선조17) 목사 신묵이 건립한 것으로 임진왜란때 서쪽 지휘대로 사용하여 많은 왜적을 물리쳤으며 팔작지붕의 전면 3칸, 측면 2칸 누각으로서 많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 서장대(西將臺) : 진주성 안 서쪽 모서리에 위치하며 가파른 절벽을 이용하여 망루를 세웠다. 확실한 건립시기는 알 수 없으나 축성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며 지금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나 현대에 와서 복원된 것이다. 내부에는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복원된 桂礎石이 유존하고 있으나 이것이 원래 서장대의 규모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 진주성 창열사(眞珠城 彰烈祠) : 임진왜란때 倭勢의 침략을 막기위해서 1610년(광해군10)에 당시 병사 남이홍이 성의 동문을 중수하여 대변루를 신축하였는데 이것이 영남 포정사의 전신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이층누각 건물로 구한말에 세운것이다.
● 영남 포정사(嶺南 布政司) : 倭勢의 침략을 받아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김시민 장군을 비롯한 39位와 諸將卒의 신위를 안치하기 위하여 1595년에 정사호가 이 사당을 세웠으며 1607년(선조40)에 국왕의 부액을 받은 사당이다. 진주성 안에 있는 창렬사는 6.25동란으로 불타고 그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목조와가를 세웠으며 내외 2칸등 부속건물이 있다.
● 진주성내 비군(晋州城內 碑群) : 진주성 안 어린이 놀이터 주위에 "牧使成候以性淸德遺愛碑" 등 대소 30여기의 조선시대 碑를 모아 세웠다. 이들 碑는 1973년 문화재 보호협회 진주지부에서 진주시내 각 처에 산재한 것 중 연고자가 없는 관리가 소홀한 碑를 옮겨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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