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대학교 |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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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교동고분군 ( 昌寧校洞古墳群 )
작성자 강** 작성일 2014-03-24 조회수 819
* 창녕교동고분군 ( 昌寧校洞古墳群 ) 지정번호 : 사적 80 호 소 재 지 :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 129 지 정 일 : 1963.01.21 시 대 : 삼국시대 분 류 : 고분 창녕은 《 三國史記 》 에 나오는 진한 ( 辰韓 ) 의 불사국 ( 不斯國 ) 으로 , 고분군은 읍의 동쪽 목마산 ( 牧馬山 ) 의 산록 송현리 ( 松峴里 ) 구릉에서부터 읍의 북쪽 교리 ( 校里 ) 에 이르기까지 대소 70 여기의 고분들이 분포되어 있다 . 이 지방의 고분들은 1918 년 교동과 송현동의 일부 고분들이 발굴되어 많은 양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보고서도 나오지 않았고 유물의 일부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 창녕군 교동 고분군 복원정비 계획에 따라 1993 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은 목마산 기슭의 고분군 중 5 기를 발굴조사하고 보고서를 간행하였다 . 발굴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횡구식 석실 ( 橫口式 石室 ) 로 봉토는 작업구역을 분할하여 유사판축 ( 類似版築 ) 하면서 주변에 호석 ( 護石 ) 을 둘렀고 호석 바깥에는 판축시 사용된 주혈 ( 柱穴 ) 이 있다 . 주혈 2 ~ 4 개가 직선상을 띠는 것은 고분의 평면이 원이 아니고 다각형 ( 多角形 ) 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은 분할되어 나타나는 작업구간과도 일치하고 있어서 주혈이 봉토작업 과정과 유관함을 보여준다 . 석실의 내부는 모두 횡구식으로 1 ? 2 ? 3 호분은 입구에 묘도 ( 墓道 ) 가 달린 것이며 3 호분의 묘도 ( 墓道 ) 는 610 ㎝ 나 된다 . 석실은 완만한 경사면에 축조되고 반지하식 ( 半地下式 ) 과 지하식 ( 地下式 ) 으로 나눌 수 있으며 반지하식이 선행 ( 先行 ) 하는 것이다 . 3 호분은 토갱내에 목곽의 기둥을 먼저 설치하고 그 사이에 석축을 하는 수법을 사용하였고 상면 ( 床面 ) 의 상석 ( 床石 ) 배치도 같은 수법을 사용하였으나 나머지 고분은 목곽 ( 木槨 ) 의 흔적 없이 입구 쪽 단벽을 제외한 삼벽면을 먼저 쌓고 입구 쪽 단벽은 상단부를 개구하였다가 최후에 폐쇄 ( 閉鎖 ) 시켰다 . 상면은 3 호분은 일부 공지 ( 空地 ) 를 남기고 전면에 상석을 깔았으나 1 ? 4 ? 5 호분은 중앙에 철상 ( 凸狀 ) 의 관대 ( 棺臺 ) 를 두고 양측 공간을 부장간 ( 副葬間 ) 으로 사용하고 있다 . 이것은 양산 부부총을 비롯한 신라지역 횡구식고분에서 자주 확인되는 예이다 . 그리고 이곳에서는 추가장 ( 追加葬 ) 의 흔적을 1 호와 4 호에서 확인하였으며 순장 ( 殉葬 ) 의 경우 1 호분에서 3 명 , 3 호분에서는 2 명이 묘도와 석실 내부에서 확인되었다 . 출토유물은 장경호 ? 유대장경호 ? 파수부유대완 ? 유개고배 ? 개 ? 개배 등의 토기와 은제조익형입식 ( 銀製鳥翼形立飾 ) ? 목걸이 ? 금제귀걸이 ? 은제과대 등의 장신구 , 대도 ? 도자 ? 소도자 ? 철모 ? 호록 ? 철촉 등의 무기류 , 철제 보습 ? 철겸 ? 철부 등의 농구 ? 등자 ? 교구 ? 운주 ? 편원어미형행엽 ? 철제재갈 ? 삼환령 등의 마구류가 출토되었다 . 이 고분들은 5 세기 전반에서 후반에 걸쳐 축조된 것이며 피장자는 창녕지방 토착세력 중에서 우두머리에 해당되고 신라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자였다고 판단된다 . 그것은 고분의 규모와 출토유물의 특징에서 그 추정이 가능하며 이로 미루어 보면 창녕은 최소한 5 세기대에 들어서면서 신라문화권 또는 신라영역권내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예로부터 창녕은 『 삼국사기 ( 三國史記 ) 』 에 나오는 진한의 불사국 ( 不斯國 ) 으로 비자화 ( 比自化 ), 비사벌 ( 比斯伐 ) 이라고도 불리던 곳이다 . 이 진한의 불사국이 뒤에 비화 ( 非火 ) 가야 ( 加耶 ) 로 발전하였다 . 비화 가야는 555 년 진흥왕 대에 신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 교동 고분군은 바로 이들이 남긴 유적으로 추정된다 . 교동 고분군과 인근의 계성 고분군 등에서 출토된 유물의 수준으로 볼 때 비화 가야가 김해의 금관 가야나 고령의 대가야에 비하여 손색 없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교동 고분군에는 왕릉이라 불리우고 있는 큰 고분을 중심으로 원래 70 여 기의 고분군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8 기 밖에 남아 있지 않다 . 1918 년에서 1919 년 사이 일본인에 의해 발굴되어 마차 20 대 , 화차 2 량 분의 토기 등 수많은 유물과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 하지만 , 일본인들은 이 고분에 대한 발굴 보고서도 내지 않았고 유물도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시켜 그 행방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 1918 년 「 고적조사보고 」 에 일부 발표된 것이 이 고분군에 대한 유일한 조사 기록으로 남아 있다 . 1918 년의 발굴 이후 이 지방에는 도굴 행위가 계속되었고 출토 유물의 대부분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