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 |||||
작성자 | 김** | 작성일 | 2014-02-03 | 조회수 | 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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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禪雲寺)
소 재 지 :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500
선운사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선운산(禪雲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선운산은 도솔산(兜率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선운산 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이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선운(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창건 후 폐사가 되어 1기(基)의 석탑만 남아 있던 것을 1354년(공민왕 3)에 효정선사(孝正禪師)가 중수하였다. 1472년(조선 성종 3) 부터 10여 년 간 극유(克乳)가 성종의 숙부 덕원군(德源君)의 후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는데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본당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다. 창건 당시는 89개의 암자와 189채의 건물, 그리고 수도를 위한 24개소의 굴이 있던 대가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613년(광해군 5)에는 무장(茂長)현감 송석조(宋碩祚)가 일관(一寬)?원준(元俊) 등 승려와 함께 재건을 도모, 3년에 걸쳐 대웅전?만세루(萬歲樓)?영산전(靈山殿)?명부전 등을 건립하였다.
현존하는 전각은 대웅보전과 관음전?영산전?팔상전?명부전?산신각?만세루?천왕문이 있고, 대웅보전 앞에는 6층 석탑과 괘불대?당간지주?석주 등이 있으며, 산내암자로는 참당암(懺堂庵)?도솔암(兜率庵)?동운암(東雲庵)?석상암(石上庵) 등 네 곳이 있다. 선운사대웅전은 보물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고, 관음전에는 보물 제279호인 선운사금동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이밖에 영산전목조삼존불상?육층석탑?범종?약사전약사여래불상?만세루?백파율사비를 비롯하여 『석씨원류』?『선운사사적기』 등이 전북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경내의 동백나무숲?장사송?송악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은 불교의 기본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왕성해지고,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던 선종(禪宗)에서도 선리(禪理)를 근본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던 조선 후기에, 조사선(祖師禪)의 본연사상을 임제삼구(臨濟三句)에 입각하여 해결해 보려고 시도한 불교학자 긍선(亘璇)이 처음 입산수도한 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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